•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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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장연군 송천 출신
김응순(金應珣, 1891.10.17~1958.1.6) 목사는 1891년 10월 17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송천(松川)에서 태어났다. 호수 항부(航夫)다. 송천은 한글 소리음으로는 ‘솔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응순은 1910년 경성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8년간 고향인 황해도 장연에서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20년 사립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한적십자사 청년의용단원으로 단원모집과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신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채포되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1920년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엔 고향 장연군 송천교회(松川敎會) 전도사로 1923년부터 사역했다.

조선 최초의 송천교회 전도사 시무
의주에서 기독교 탄압이 자행되자, 송천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소래 출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자신들의 외갓집이 있는 송천으로 피신와서 그 곳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조선 최초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닌 토착민인 조선청년교인에 의해 설립된 장로교회였다.
이 때 이 마을에 살던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조선장로교회는 이렇게 하여 자생교회(自生敎會)로 설립된 교회이다. 이는 선교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로교회보다 1세기 앞선 조선천주교회의 경우도 흡사하다. 이승훈이 북경 한 가운데 있는 북당천주교회를 스스로 찾아가 한문 필담으로 중국교회 신부들과 소통이 이루어져 천주학(天主學)의 도리를 깨닫고 성삼위의 이름으로 영세(領洗 Baptism)를 받고 ‘베드로’라는 영세명까지 얻어 귀국하여 오늘날 명동천주교회가 서 있는 역관 출신 김범우 자택에서 미사행위를 시작해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의 시원을 이루었다.  
이 무렵 김응순도 송천교회를 다녔고 송천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경하여 경성제일보통학교(6년제)를 졸업한 것이다.
김응순은 1927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처음 황해도 봉산군 홍수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35년 9월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서기에 선출되어 총회를 받들어 봉사하기도 했다.
1936년 6월부터는 황해도 해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37년에는 황해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p.548 참조).

친일파 조직 평양 기독교친목회 회원으로 가입
이 때부터 일제 당국은 그의 지도력을 알고 있던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평양 기독교친목회의 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이 회를 창립한 인물은 숭의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오문환(吳文煥)이었는데, 오문환은 1938년 조선장로교회를 신사참배 쪽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목사 등을 인솔하여,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下開)에 도착,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교토(京都)에 가서 평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다시 도교(東京)를 향해 가서 오늘날도 일본 관료들의 참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전범까지 안치되어 있는 야스꾸니(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라는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왔다.
그후 조선교회 목사들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37 참조).

총회장 당선 후 본견적 친일활동
김응순은 1942년 2월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주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참여했고, 같은 해 9월 장로회 헌납 해군기(海軍機) 영명식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자 국민총력 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총회장이 된 후  교파합동, 규칙개정,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재래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본정신(日本精神)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日本的基督敎)를 새롭게 산출하여 수립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1942년 11월 12일 정인과(鄭仁果), 전필순(全弼淳) 등과 함께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총회연맹 주최로 황군(皇軍)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을 갖고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고, 또 같은 달 1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기독교단 제1회 총회 축하사절단으로 김종대(金鍾大) 목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을 비롯 야수꾸니신궁과 메이지신궁까지 참배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1943년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장로회 연맹 이사장으로써 경성 승동(勝洞)교회에서 일본정신(日本精神) 채득을 목적으로 한 전국노회장 대표 연석회를 개최하고, 참석자들을 친히 인솔하여 남산(南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국체 본의에 철저하고 대동아전쟁 목적완수에 매진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을 도모하여 본회의 사명 달성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전시 포교 지침 선언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같은 달 징병제도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여자 대표연성회를 경성 대화숙(大和熟)에서 열고 총회장으로써 훈사를 했으며,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총회 연맹이사장으로써 각  노회 연맹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귀금속 헌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회’ 설립
1943년 5월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을 채택하여 일본기독교단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이르러는 이동욱, 갈홍기, 채필근과 함께 조선종교단체 전시보국회 기독교위원으로 활동,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1945년 5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주최 지방순회 강연회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개신교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 할 때 조선교단의 고문 겸 황해도 교구장을 맡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제31회 총회부터 모든 목사들이 약속이나 한듯 앞다투어 창씨개명(創氏改名)하는 풍조가 불어닥쳤다.
심지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회의록마저 일본어로 기록 출판하므로 조선교회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애석했던 바는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총회 사회를 보면서 신사참배에도 모자란듯 일본의 전승기원예배까지 드린 일도 있었다.
1942년 2월 10일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케 하여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정을 매입 기증했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육군환자용 엠블런스 3대, 9월 20일에는 함상 전투기 1대를 구입 기증했으며, 전국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의 종 1,540개를 모아 당국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 종이 어떤 종이었던가. 새벽마다 예배시간마다 신자들에게 모임을 알리는 복음종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시대적인 불가항력적인 전시환경이었지만 비극적인 사례들이요, 복음과 교회의 수난이었다. 교회는 드디어 1943년 일제의 강압적 종교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제31회 총회 당시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① 개회 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먼저 채택하고 총회가 열렸다. ②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를 병합하기로 결의하였다. ③ 1942년 9월 20일 해군에 헌납한 전투기를 <조선장로호>라 명명식을 가지기로 하다. ④ 총회의 회의록을 일본어로 정리 간행하기로 가결하다. ⑤ 외국 선교사들은 전원 본국으로 출국하기로 하다.

광복 후 월남하여 인천서 교회개척
김응순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계속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연맹(基督敎聯盟)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51년 1월 월남해 인천에 정착 후, 1952년 인천에 보합교회를 설립했고, 인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일하였다.
한편, 인천보합공립학교와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아 무산아동들의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지나간 역사이기는 하지만 제31회 총회야 말로 조선교회가 당했던 가장 수치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아니하는 총회라 할 만큼 치욕적인 총회였고, 총대들 스스로가 무능한 총회로 마감한 것은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과제를 던져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제31회 총회와 같은 총회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대 장로교가 지고 가야 할 사명의 멍에는 무겁고 버겁게만 해 보인다. 다시 한번 손양원, 주기철과 같은 신앙의 귀인들이 필요한 시대가 이 때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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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31회 총회장 김응순(金應珣)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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