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3.1만세운동 가담 1년 6개월 옥고
흥사단과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조달 가담
미 프린스톤신학교 유학 후 신의주제일교회 담임
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이사장 맡아 친일부역
충북도지사·문교부 교과서 편 수관 등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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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북 의주 출생
윤하영(尹河英 1889. 8. 6~1956) 목사는 1889년 8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 광명에서 윤연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까지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한문서숙(漢文書塾)에서 한학(漢學)을 익혔다.
1907년 구성으로 온 가족이 이사 나왔고, 이듬해 1908년 선천(宣川) 주재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램프(Rev. Henry Willard, Lampe. 남행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입신(入信)하게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 겸 조사(助師)가 되어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때마침 선천에 성경학원이 문을 열게 되자 이 학원에서 3년간 성경과 교양을 쌓았다. 1915년 8월에는 평북노회의 추천을 받아 다음 해 4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1917년 8월에 정식으로 평북노회(平北老會)로 부터 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향 광명으로 돌아가 장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신학교에 복학, 1921년 6월 제14회로 김관식, 김응진, 이대영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에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평북 용천군 용계동교회를 맡아 목회하였고, 1923년에는 같은 군 광화교회(光化敎會, 1905. 10. 19 설립)와 덕동교회(德洞敎會, 1909. 7. 12 설립)로부터 공동 초청으로 청빙되어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24년에 중국 난징(南京)으로 가서 어학(語學)을 준비하면서 1928년 8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청원하고 들어가 흥사단특별단우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잠시 남경대학(南京大學)에 적을 두고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조달 모금운동에 가담해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 주에 있는 유명한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목회하였다.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1938년 4월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생일인 천장절에 신사참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韓京職) 목사와 함께 5월 신의주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후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곧바로 일제(日帝)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엔 전국교회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열심히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또 총연맹 이사장으로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 26개 노회장에게 공문을 보내 각 노회마다 노회지맹(老會支盟)과 각 교회 애국반을 조직하고 보고 하도록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서울 초판 p.719 참조.)
윤하영 목사가 신의주제일교회로 부임한 후 교회가 크게 성장, 의산노회(義山老會) 안에서만 아니라 예수교장로회 안에서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1939년 9월 8일 신의주제이교회에서  제29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성경 히브리서 11장 31절부터 12장 2절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어 임원선거에서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 교체가 끝난 후 9월 11일 윤하영 총회장 지도하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평생동안 친일부역자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살게 되었다.
당시 결성식 사회는 곽진근 목사가 진행하였는데, 먼저 궁성요배를 하고 국가봉창 황국신민 서사제창, 찬송가 제창, 기도, 성경봉독, 취지설명 선언, 내빈축사 순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후 의산노회 총대로 총회에 몇번 출석하고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1941년 12월 8일 미일전쟁, 소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돌아온 윤하영을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신의주로 돌아오자 마자 즉시 미제국주의 앞잡이로 낙인찍어 그를 시무하는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쫓아내라고 외압을 가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하영 목사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신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마(白馬)라는 곳으로 갔다. 역시 미국에서 유학(프린스톤신학교)을 마치고 온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도 같은 처지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24 참조).
1940년 1월이 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의 지시에 따라 각 노회지맹(各老會支盟)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긴급공문을 보내 시국대응(時局對應) 제실시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같은 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본부의 지시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각 교회 담임자에게 <기원절 봉축행사에 관한 건>이란 공문을 보내 행사 참여를 독려했다.
다음 2월에도 총회연맹 이사장으로부터 <황군(皇軍)을 위한 위문품을 위한 공고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기한을 정해 금품이나 위문품을 총회연맹 본부로 보내도록 했다.
같은 달 신의주에서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義山老會)지맹 이사를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이르러는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지맹 이사장과 애국반장에게 <“씨”설정계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포교자(교회지도자)들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8월에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애국반 조직 독촉의 건>이란 공문을 보내 각 교회에 애국반(愛國班)을 조직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서 온 공문 70여통을 받아 각 노회지맹 이사장들에게 총63회의 통첩문을 보내 연맹의 지시와 통첩에 따르게 했고, 전국 26개 노회 전체에 노회연맹 지회를 조직케 했고, 각 교회에도 730여 개의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일제는 교회지도자들을 배일(排日) 혐의자로 모두 검속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일제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목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윤하영 목사는 그해 9월 신의주제일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다시 시작했고,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와 함께 뜻을 같이 하여 기독교사회민주당(基督敎社會民主黨)을 결성하여 정당으로 출발했다.
이후 갑자기 북한에 붉은군대 소련군이 진주해 와 종교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자 북쪽에서는 복음전도 활동이 앞으로 원만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직감하자 한경직과 함께 월남하기로 결심하였다. 월남해 서울에서 당시 남쪽에 진주해 있는 미군정청(美軍政廳) 공보부 여론조사과장의 직을 맡아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 2월과 1947년 2월 두 차례나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으나 1948년 11월 하순 무렵 구호물자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1949년 1월 충북지사직을 면직 당했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도쿄(東京) 주재 미군극동사령부(美軍極東司令部) 공보요원(公報要員)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자 귀국해 문교부(文敎部)교과서 편수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제2권, 같은책 pp.710~711 참조).
한편 교계를 위해서는 기독교계명협회(基督敎啓明協會)를 조직 문맹퇴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윤하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했던 제28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황동노회와 평등노회 그리고 군산노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② 평양에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본 총회가 직영하기로 결의하다. ③ 교역자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성(京城 서울)에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현재 한신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예장총회 사무국편, 예장(합동)총회 2013 서울 p.16 참조).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6년(월·일은 미상) 소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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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28회 총회장 윤하영(尹河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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