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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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의 교육과 개혁신앙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제네바 비스티옹공원에는 당시 종교개혁의 지도자 네 명의 동상이 중앙에 부조되어 있다. 요한 칼빈, 기욤 파렐, 테오도르 베자, 존 낙스가 그들이다. 이 기념비는 제네바 종교개혁에서 이들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는 칼빈의 신실한 친구이자 계승자인 테오도르 베자에 대해 살펴본다.
베자는 1519년 6월 24일 유서깊은 부르고뉴 공국 베젤레 마을에서 아버지 피에르 드 베자와 어머니 마리 부로델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넷이 더 있었다.
아버지 피에르 드 베자는 부유한 지방 행정관이자 공국의 명문가의 후손이고, 어머니 마리 부로델로는 학식있고 인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테오도르는 그의 세례명이다.
그는 세살 때 어머니가 죽기 직전 그의 삼촌인 파리 의회의 의원 니콜라스 베자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최고의 교사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를레앙의 그리스어 학자인 멜키오르 볼마르이다. 볼마르는 칼빈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의 삼촌은 1535년  그의 나이 9살 되던 해에 테오도르를 볼마르에게로 보냈다. 처음에는 오를레앙에서, 후에는 부르주에서 지내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이미 볼마르는 루터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인 학자였다. 테오도르는 이 민감한 시기에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칭의 교리를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새로운 사상의 옹호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집안의 기대대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해 1539년 8월 11일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20살이 되던 해에 파리로 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을 공부했으나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삼촌과 아버지를 설득해 문학 공부로 그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에서 문벌 좋고 재치 있는 학자로서, 시인이고, 미남인에다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평가되어 상류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심촌 클라우디우스의 영향력으로 가톨릭교회의 두 개의 성직을 차지하여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었고, 1544년 비밀리에 클로딘 데노즈라는 여인과 결혼식도 올렸다. 그가 비밀리에 결혼한 것은 봉록이 나오는 가톨릭의 성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548년 시 모음집 ‘유베닐리아’(Juvenilia)를 출간했다. 볼마르에게 헌정된 이 책은 그를 당대의 제일 가는 라틴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개혁파 사상을 찾아내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 중병이 찾아왔다. 죽음에 직면한 그는 자신이 개혁파 신자이면서도 가톨릭교회의 아들인양 교회의 봉록을 받는 이중성을 보여왔다는데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병중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조국을 뒤로 하고, 부와 명예도 버리고, 스위스 국경을 넘어 1548년 10월 23일 제네바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절친한 친구 칼빈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에서의 베자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난 베자는 클로딘 데노즈와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튀빙겐에 있던 볼마르를 찾아가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로잔을 들렸는데, 거기에서 로잔의 개혁자 피에르 비레의 환대를 받았다. 그로 인해 1549년 11월 6일에 로잔의 학당에서 그리스어 선생이 되어 로마서와 베드로 서신을 강의했다.
당시 로잔은 베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로잔에 머무는 동안 파렐과 함께 이웃에 있는 발도파에 대한 박해를 변호하는데 노력했다.
그후 1558년 제네바 시에서 고등학교를 설립하자, 베자는 칼빈의 제안에 따라 그리스어 교사직에 초빙되었다. 그로 인해 베자는 로잔을 떠나 제네바로 가서 그 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어 제네바 시민권을 획득하고, 1559년 3월 17일 제네바에 있는 한 교회를 맡아 목회했다. 그때 파리 의회의 의장 안 뒤 부르(Anne du Bourg)가 앙리 2세 앞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고백하여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칼빈은 베자를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보내어 그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뒤 부르를 구하지는 못했다. 뒤 부르는 재판을 받고 1559년 12월 23일 처형되었다. 
그런 일을 하는 동안 베자는 프랑스의 모든 개혁파 신자들로부터 가장 탁월한 웅변가요, 칼빈 다음으로 저명한 신학자로 인식되었다. 베자는 위그노들과 프로테스탄트 신앙 문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칼빈의 계승자로서의 베자
칼빈은 베자를 깊이 신뢰하였다. 오랜 병마와 싸우던 칼빈이 죽자, 베자는 그 장례를 주관하고 곧 자신의 후원자요 친구인 칼빈에 대한 전기를 집필하였다. 시의회는 그를 칼빈의 후계자로 선임하였고, 제네바 목사회는 그를 의장으로 선출해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케 했다. 시정과 교회에서 칼빈의 지도력을 계승한 그는 설교와 교육에 헌신했다.
베자가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동안 프랑스의 개혁파 위그노들은 매우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는 1571년 4월 2일부터 17일까지 로셸에서 열린 프랑스 개혁교회 제7차 전국대회에 참삭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내키지 않았으나 교회의 치리 문제와 개혁에 대한 스위스 교회들의 공식적 견해를 밝혀야만 할 이유가 있었기에 프랑스로 가 그 대회에 참가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대회에서는 개정된 신앙고백문이 작성되었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니스메에서 개최된 또 다른 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개혁파 교인 약 3만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은 주일이자 성 바돌로매 축일이었는데, 이날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가톨릭 교도들이 개혁파 교도들의 교회와 집을 습격하여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를 학살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간 프랑스 각처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반복되었다. 그로인해 피난민들이 제네바로 쏟아져 들어왔다. 베자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상처받은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라고 권면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나약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랫동안 감당해 왔던 책무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1586년에는 매일 하던 설교를 주일에만 하게 되었고, 1598년에는 아카데미 일에서도 물러났다.
말년에는 어이없는 일도 겪었다. 1597년 프랑수아 드 살레라는 가톨릭의 사제가 베자를 개종시키려는 특수한 목적으로 제네바에 온 것이다. 프랑수아는 베자를 만나 금화 4천 크라운을 매년 연금으로 주겠다며 가톨릭으로 돌아오라고 회유했다. 4천 크라운은 베자의 전재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러나 베자는 그에게 “나를 떠나시오. 나는 너무 늙고 귀가 멀어서 그런 말은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소이다”라고 대꾸하고 물리쳤다.
그런데도 일부 지역에서는 베자가 굴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심지어 제네바의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베자와 함께 로마를 향해 가고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퍼져나갔다. 이 유언비어에 속은 시에나의 가톨릭 교도들은 1597년 9월 어느날 이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가톨릭측은 그가 죽었으며,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말을 퍼드렸다. 그러자 베자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또 자신이 여전히 가장 엄격한 칼빈주의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사실을 알리는 풍자시를 지어 그 소문의 거짓됨을 폭로했다.
당대 최고 학자들에 필적할 만한 지식을 갖춘 이 비범한 개혁자의 마음 속에 지녔던 목표는 제네바와 프랑스의 개혁교회의 보존이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1605년 10월 13일 주일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제네바 시내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묻혔다.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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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운동 500주년 기념 특집-16 칼빈의 계승자 테오도르 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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