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십자군’은 아르메니아의 미노르(길리기아) 왕 헤토움 1세와도 동맹을 맺었다. 헤토움 1세는 친히 대칸 몽케의 본거지에 가서 7개 조항의 조약을 제시했다. 그 조약은 ①모든 백성과 함께(칸이) 세례를 받을 것, ② 기독교인과 타타르(몽골)족 사이에 우정을 확립할 것, ③ 성직자에게 세금을 면제할 것, ④ 성지를 (회복하면) 기독교인들에게 반환할 것, ⑤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제거할 것, ⑥ 왕이 요청하면 모든 타타르 지휘관들은 지체 없이 도움을 제공할 것, ⑦ 무슬림이 이전에 아르메니아인에게서 빼앗아 간 땅을 반환할 것 등이었다. 칸은 헤토움 1세가 제시한 조건에 응할 것을 약속했다.
◇군사 원정은 1256년 1월 아무다리야 강을 넘어 1257년 말에 이란의 모든 이스마일리파의 요새를 일소하고, 1258년 2월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훌레구는 신조(信條)와 상관없이 점령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한 살육과 약탈을 금했다. 이어 몽골군은 헤토움 1세와 그의 사위 안티오크의 군주 보에문트 6세의 병력을 합치고 시리아로 진격했다. 1259년 봄에는 몽골군이 팔레스타인에 도달했다. 성지에서 이슬람 지배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교황의 특사는 자신들의 허락없이 몽골족과 동맹을 맺은 보에문트를 교회에서 파문하고, 십자군 기사들과 수도사들은 몽골 십자군을 배신했다.
◇1259년 가을, 훌레구는 전장(戰場)에서 대칸 몽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몽골 제국에서는 대칸이 죽으면 모든 일이 중지되었고, 징기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쿠릴타이에 직접 출석할 것을 요구 받았다. 따라서 훌레구는 키트 부카가 지휘하는 2만명의 병력만 팔레스타인에 남기고 이란으로 되돌아갔다. 그후 시돈을 통치하던 줄리앙 백작의 십자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몽골 정찰대를 덮쳤다. 격노한 몽골군은 시돈을 살육했고, 십자군은 몽골군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 틈에 쿠투즈가 이끄는 이집트의 맘루크(국가노예) 군사가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통과해 몽골군 배후의 갈릴리로 들어가 몽골군을 덮쳤다. 이로써 황색 십자군은 분쇄되었다. 쿠투즈는 승리 후에 다마스쿠스로 입성하면서 그 곳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을 살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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