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본고는 지난 9월 9일 화평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9월 월례회에서 지형은 목사가 발제한 ‘예배, 어떻게 개혁할까?’를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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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무지와 오류로 왜곡된 중세의 예배를 참된 성경적 예배로 회복시키기 위한 예배 개혁으로부터 촉발되었다. 깔뱅은 중세 예배의 비성경적 요소들을 타파하고, 성경적 원리 위에서 단순하고 열정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를 원했던 초대 교회의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개혁자들이 열망했던 성경적 예배의 이상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진지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며 교통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자리에 임재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더욱 견고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 그와 같이 예배는 신인 사이의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 행위들에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배를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 행위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예배를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응답의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이해 가운데서는 자연히 인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고, 인도자가 은혜롭게 기도를 인도하고, 찬양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해야 은혜로운 예배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인간 편의 기능을 강조하면 결국 은혜로운 예배를 찾아 교회들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교인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각종 문화적 도구들과 소통의 기법에 집중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예배가 회중의 만족을 위한 영적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은 예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신적 행위들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예배를 통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예배의 매 순서를 통해 하늘의 입맞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배 가운데 “오!” 라는 경이에 찬 탄성을 잃어버린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오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를 놓쳐버린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신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예배의 몇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자.

(1) 설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회중에게 주께서는 말씀으로 은혜와 복을 주신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인간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설교자(The Preacher)는 하나님이시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은 설교 중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시켜 말씀을 선포케 하셨던 성령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도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을 따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계시가 선포된 계시로서 우리를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으로 세움 받은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엎드려야 한다. 설교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왕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믿음이요 겸비함이다(고전 2:3 참조). 만약 설교자가 들은 것이 없이 들은 체 하거나, 사람의 칭찬을 위해 청중에게 아첨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메시지를 이용하거나, 남의 메시지를 표절하는 부정직을 남발한다면 그는 왕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한국 교회 강단의 회복은 설교자들이 설교사역의 고귀함과 영광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과거 위대한 부흥의 시대보다 오늘날의 설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뒤쳐져서가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례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성례는 은혜계약의 거룩한 표와 인침으로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라고 규정한다. 세례는 우리의 죄 사함과 거듭남을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며, 성만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다.
표(signs)는 상징(symbol)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개념이다. 표는 영적인 실체가 실제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을 뿌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구원의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표를 받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 쳐주시는 일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다.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합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성례를 이러한 신적인 ‘표와 인침’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인간 중심의 행위로 이해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예를 들면 세례의 핵심을 참된 교인으로 살겠다는 수세자의 결단과 서약에 둔다. 그래서 세례 받을 수 있는 자격 여부가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수세자를 교육시키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없는 교인들은 세례 받기를 주저하는 현상마저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세례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외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세자를 교육하는 것은 세례 후에 풍성하고 복된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세례를 위한 자격 기준은 아니다. 세례는 값없이 구원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세례를 하나님의 거룩한 표와 인침으로 이해하면 세례 받기를 열망하게 될 뿐 아니라 세례식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놀랍고 은혜로운 의식이 된다.
한국 교회는 성만찬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상징적 의식 정도로 생각한다. 성만찬이 상징이 되면 그것을 자주 거행할 필요가 없다. 너무 자주 거행하면 면역력이 생겨서 상징의 약효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떡과 포도주는 고난을 묵상하는데 효과적인 매개물은 아니다. 떡과 포도주보다는 차라리 대못이나 가시 한 토막을 나누어주는 것이 고난을 연상하는데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가 내 속에 녹아들어 나와 일체가 되듯이 주님과 우리가 뗄 수 없는 생명적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성만찬은 가장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의식이 된다. 매 주일 성만찬 받기를 열망하게 된다. 설교가 없는 예배를 상상할 수 없듯이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3) 입례와 축도
설교 전의 여러 가지 입례의식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며 행하던 의식을 본받은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늘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으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입례의식의 여러 항목들은 단편적인 별개의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결된 순서들이 되어야한다. 즉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회중의 기쁨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축도는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올려드리는 기도나 기원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와 같은 축도의 본질적 성격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축도’라는 용어보다 ‘복의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눈을 떠서 축도자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감격스럽게 받아야한다. 축도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끝말도 당연히 “있을지어다.”가 되어야한다.

맺는 말
근래에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이 주인이 된 예배,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엔터테인먼트 예배,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예배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고 있다. 그 모든 문제의 뿌리는 예배를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잘못된 예배 신학에 있다. 예배를 인간이 주도하는 행위로 이해하면 예배가 기능화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예배를 찾아 사람들이 쏠리게 될 것이며, 교회 성장에 명운을 건 목회자들은 성장에 득이 되는 예배를 기안하고 싶은 유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회중 간에 교통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해야한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예배의 매 순서 가운데 친히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회중이 그 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서는 영광을 갈망할 때 우리의 예배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구경하시는 하나님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전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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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예배, 어떻게 개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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