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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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 출생
이기창(李基昌 1949.3.25~) 목사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창 소년이 태어난 전북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부가 일찍부터 들어와 선교의 기반이 잘 다져지고 있었고, 익산 지역 역시 군산지부가 자리잡고 있어 기독교 선교영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익산은 불교 영향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원불교 발상지가 되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불교의 영향이 강한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
기창 소년이 태어난 시기 역시 일제 말엽이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라 소위 정부수립 전후 혼란했던 해방 공간(약3년)에 세상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의식주 문제가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의 사랑과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여러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큰 탈 없이 자랐고 제법 장남의 자질까지 보여 부모님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여러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이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익산에 있는 혜성고등학교에 입학, 새로운 배움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어 조국의 미래를 위해 농업기반을 잘 닦아야 경제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국립대학으로 출발한 전북대학교 농업경제분야 학과로 진학하였다. 그러던 중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을 받고 졸업하자 마자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학대학원)와 신학석사(Th.M)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총신은 일찍부터 신학은 인문학의 바탕 위에 고도의 학문성을 쌓아야 한다는 교육이념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신학준비과정으로 교양과 어학 및 철학 위주의 신학예비과정으로 2년 과정의 예과(豫科) 과정을 두었다.  
이기창 목사는 전주북문교회(全州北門敎會) 8대 담임목사로 부름받고 부임한 해가 1982년 9월 3일이었다. 당시 북문교회 당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조건이 세가지였다. 첫째 일반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를 졸업한 분, 둘째 40대 미만의 젊은 목사로 신앙인격과 비젼을 겸비 하신 분, 셋째 말씀선포에 은혜가 깊고 교회 행정에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는데, 이 목사가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인격과 신앙 그리고 영력(靈力)을 갖춘 분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이레란 말이 있듯이 이기창 목사야 말로 전주북문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자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농업경제분야 전공한 목회자
전주북문교회 제8대 담임목사
예배·기도·성경공부 통해
신앙생활의 역동성·선교의 활용화 이뤄
지역복음화와 지역발전에 기여

이기창 목사는 전주북문교회와는 이미 인연이 있었다. 1978년 7월 16일 북문교회 강도사로 부임해, 동년 10월 1일엔 부목사로 취임 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온화한 성품과 진실성이 이미 성도들에게 검증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 부흥발전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정해 온 교인들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였다. 첫째 예배운동이었다. 예배의 경건성을 강조하며 신령과 진리의 예배본질을 일깨우는데 힘을 다하였다. 둘째 기도운동이었다. 기도를 통해 상처를 치유받고 기도를 통해 교회부흥의 기초와 원동력으로 삼아갔다. 침체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일깨우기 위해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상기도를 생활화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셋째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교육에 힘썼다. 침체된 교회와 교인의 분위기 쇄신과 교회의 동력화를 위해 전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토대로 한 신앙의 생활화에 힘썼다. 구체적으로 온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권찰 성경공부반 개설, 신학교류에 준하는 신앙교육 신앙정도에 따라 여러개 반을 편성 운영하였다.
교역자들의 교인 가정심방 강화에 이어 교회의 목표로는 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요한 4:24), ②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행 1:8), ③ 그리스도의 분부하는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교회(마 28:10~20)로 정하였다.
다음으로 성도의 생활지표로 ① 성경중심의 삶(행 17:11~12), ② 기도에 힘쓰는 삶(살전 5:17), ③ 전도에 전력하는 삶(막 1:38), ④ 주일성수의 온전한 삶(계 1:10, 시편 58:13~14), ⑤ 십일조와 헌금에 성실한 삶(말 3:10)을 제시하여 집중해 나갔다.
이기창 목사의 부임 이후 또 다른 집중사역은 선교활동 전개와 예배당 증축 사업과 여전도회 확장사업과 찬양대의 획기적인 부흥과 발전이었다.
다음으로는 교세의 확장에 힘입어 교육공간 확보는 새교육관 건축의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유·초등과 중·고등부 및 청년 모임의 원활을 기했다. 이에 교역자(부목사, 강도사 및 전도사) 확충을 가져오게 되었고 교회 신앙생활의 역동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기구를 개편했다.
1990년 6월 24일 선교위원회를 조직, 해외선교와 국내선교를 동시에 균형있게 시행하였다. 처음으로 선교목사(소방은 목사)를 청빙, 국·내외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1991년도에 해외선교사 지원(싱가폴 조기술 목사), 소방은 조영아를 터키에 파송하였고, 국내선교지 지원이 25개 교회였다.
해마다 해외선교사 지원과 국내선교 지원교회는 점점 증가했고, 1995년까지 해외 선교사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위에 언급한 터키 외에 네팔에 허인석 선교사, 독일에 이남백 선교사, 페루에 이천현 선교사, 호주에 서정권 선교사, 케냐에 김수찬 정영은 문승호 선교사, 태국에 이춘우 선교사, 남아공에 박진호 이한진 김창길 박성자 선교사, 영국에 민경수 선교사, 필리핀에 소광은 이석태 선교사, 중국에 김진완 허철희 박재용 선교사, 코소보에 한태진 선교사, 불가리아에 김아진 선교사, 인도에 이병구 임수정 선교사, 미안마에 김병갑 선교사를 파송,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여전도회 역시 눈에 띄게 확장되었는데 1991년 제3여전도회로 확대되고, 2000년도에 이르러는 10개의 여전도회로 늘어났고, 이들이 교회 봉사와 선교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전주북문교회50년사, 하재준 편, 전주북문교회 2005, p264 참조).
그가 남긴 설교 가운데 누가복음 19장 41~44절의 본문으로 <예수님의 눈물>이란 설교를 보면 그의 목회철학과 목회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첫째 예루살렘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다. 둘째 예루살렘성이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셋째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량하게 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기창 목사님이 내 조국이 내가 목회하고 있는 전주성을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눈물로 사역앴다고 여겨진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서울 p.367-369참조).
이기창 목사는 2011년 9월 19일~23일까지 그의 모교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6회 총회에서 명예로운 예장 총회장이라는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자기가 속한 전주노회 노회장을 비롯 전북신학교 교수 및 지역사회를 위하여서도 여러 방면에 기관장들과 협력, 지역복음화와 지역발전을 위해 대소사를 챙기는 다정다감한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교단 대표로 기독교텔레비전(CTS) 대표이사를, 같은 재단의 CTS전북방송 이사장, 총신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재임했던 제96회 총회 결의안 중 중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헌법개정위원 15인에게 맡겨 헌법을 개정하기로 하다. ②총회 총무 임기를 3년으로 하고 1회 연임 가능한 것으로 개정하다. ③ 강단용 성경은 개역판과 개정개역 4판을 병행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다. ④ 헌법정치 제4조 4항에 <20년 이상 시무> 는 <부임 20년>으로 하다. ⑤ 만 70세 유권해석 재요청 건은 제93회 총회 결의대로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하기로 하다.
이기창 목사에게 2004년 2월 28일 미국의 퍼시픽대학교(Pacitic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그의 목회사역과 교회행정력을 인정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다.
슬하에 2남1여의 자녀가 있으며, 장남 강천 목사는 아버지의 성직을 이어 미국에서 교민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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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96회 총회장 이기창(李基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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