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하나님의 축복은 개교회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 아니다

한국기독교는 과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로 세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로서 세상을 향해 그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우리사회서는 신흥종교단체들이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자를 써서 ‘교회(敎會)’라는 용어를 아무나 사용하지만, 기독교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에클레시아’이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로 이 공동체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 부른다.
이들은 처음에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으며,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고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행 2:42-47).
이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제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1-32).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원시교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교회가 역사 속에서 민족과 문화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이 바뀌긴 했지만 그 원리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만약 그 원시교회의 원리가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변질한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단적인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원형의 틀이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임으로 원시 예루살렘 교회의 원형이 지금도 그대로 재현될 수는 없다. 그 형태는 사회의 변화와 문화현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정신, 즉 원시교회의 본디 모습이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며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과 정신을 되찾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개혁교회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기독교는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신학과 전승을 고치기 위해 투쟁한 프로테스탄트 가운데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불리우던 장로교가 주류를 이룬다.
개혁교회는 중세에 개혁이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오늘도 계속 역사 안에서 ‘개혁하는 교회’를 뜻이다. 이 개혁교회는 중세에 수백만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과 재산을 받쳐 이룬 역사적 교회이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가 한국에서는 종교권력화 하여 교권과 물욕과 명예욕을 탐하고 있다. 이는 개혁교회 원리에서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제 겨우 그 역사가 100여년이 조금 넘어 예배당 하나 지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 싶으니까, 지도자들이 사심(私心)을 드러내고 세속적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세속적 욕심을 드러내게 되면 그 교회는 오래지 않아 망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교회론이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다.
사도성을 계승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것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든지 모두가 ‘하나’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그런데 한국교회는 찬송가에서는 교회의 이 하나의 원리를 이해하고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내 교회’라는 개교회주의를 내세운다. 이러한 개교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기독교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다.
개교회주의는 무엇보다도 교회 재정운영의 폐쇄성으로 인해 지체의식이 없어지고, 교회와 교회 간에, 목회자와 목회자 간에 동료의식을 약화시킨다. 결국 자기 능력껏 살아가는 ‘무당네’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특히 노회(presbytery)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개교회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에는 장로교회도 ‘독립교회’ 운운하며 개교회주의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렇게 운영되는 교회가 많이 있다.
둘째, 축복신앙으로 변질된 기복주의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은 무속적 기복주의에 점령당한 상태이다. 한국의 종교는 모두 기복화(祈福化) 되고 있다.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종교가 있는 곳에는 기복행위가 있다. 기복은 자식과 재물과 부귀와 출세를 위하여 빌고, 병을 고치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소시민적 행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복(祈福)과 종교(宗敎)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현상이다. 더욱이 기복주의(祈福主義)는 성경의 축복신앙(祝福信仰)과는 거리가 먼 사상이다.
기복은 모두 현실적인 삶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기복행위는 언제나 현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태도를 갖는다. 따라서 기복주의자들은 구체적인 욕망들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진다. 심지어 기복주의적 목회자는 돈벌이가 잘 되어야 행복하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복과 복음은 완전히 다르다. 기복주의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양육할 수 없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언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아직도 세계교회들 중에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가 많다. 1년 내내 교회력을 부활절에 맞추고 있는 교회들은 기복주의 설교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셋째, 종교산업화 하는 물량적 성공주의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세속주의로서 교회의 적이다. 유전가사귀(有錢可事鬼)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 성공주의자들은 교회도 돈이 있으면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고, 교육관을 크게 늘리고, 산속에는 수양관을 세우고, 교인들을 몰고 다니며 성지순례다, 무슨 잔치다 하며 폼나게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회는 ‘소명’에 따른 직업이다. 소명보다 ‘목회 비전’을 앞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이고,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한 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진리이다. 교인이 근면 성실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을 살면 영적 축복뿐 아니라, 물질적 축복도 함께 온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때 축복받는 물질은 그 개인이나 개교회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회적 연관성을 가지고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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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② 비성경적 비신학적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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