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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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군 출생
박성겸(朴聖謙 1910.2.26~1984.4.2)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평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안악지방은 평양과 신의주, 원산에 이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영향으로 기독교 복음이 일찍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세 역시 평양과 의주에 비길 정도로 기독교가 활발하게 뿌리내려진 곳이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개화한 지방이었다.
성겸 소년은 일찍이 부모들이 복음을 받아 신종하여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일찍부터 교회에 출입하였고, 초기 선교사들과 조선인 조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이 자나라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 역시, 1905년 소위 한일합방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 세웠으나 실상은 을사늑약이란 말이 말해주듯 조선의 국권을 강탈 당한 암울한 시대였다. 이러한 때에 성겸 소년이 태어났으니 그의 앞날이 어떠했겠느냐에 대하여선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족적인 저항이 의병들의 무장투쟁이었고 민족의 계몽 및 실력 향상을 위한 신민회(新民會) 활동과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 시위였고 3.1독립운동이었다. 그 중심세력은 전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종교단체들이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힘을 모으고 만세 시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운동의 실체가 되었다.
이와같은 종파의 이념과 교리를 능가한 연합활동으로 3.1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독립이란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독립을 명분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자유와 정의, 독립과 저항의식을 비폭력 무저항으로 힘을 합쳐 민족 구원과 국권회복이란 대의를 위해 양보와 희생 그리고 애국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총회 주일학교 및 장년부 공과 집필
교단지 ‘기독신보(기독신문)’ 발행에 기초 놓아
‘은성문화사’ 설립 목회자료 공급
한학에 능통한 문필가요 교정가
“총신대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 등록금 면제”

성겸도 복음을 접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배우며 교회가 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가 조국의 해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과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신은 교회와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가장 효과적이며 실질적인가를 생각하며 성장해 갔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미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에 안악군 내에는 교동교회(橋洞敎會)를 비롯 덕산교회(德山敎會), 서하면 대동교회(大同敎會), 안악에는 읍내교회(邑內敎會)와 무석교회(武石敎會) 및 삼상교회(三上敎會) 등이 설립되었다(史記 上 1928, p.24).
정치 경제적으로는 심히 어려웠으나 종교적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복음이 전래되어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개화되어 있었고 일제가 만만하게 대중을 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찍이 교회가 운영하는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졸업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938년 6월에 졸업한 후, 같은해 11월 28일 황해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1938년부터 1947년까지 송화군 상리면 도은교회(1907. 6. 10 설립) 위임목사로 10년 간 시무하였으며, 1940년부터 1947년까지는 은율성경학교 강사로 성경을 가르쳤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는 수교교회 위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황해노회의 서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북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북한에서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간섭으로 박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1951년 1월 14일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가족들과 교인들을 이끌고 월남하였다.
그는 안악에서 멀지않은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 백령도로 피난 와서 백령도에 있는 화동교회, 진촌교회와 사곶교회를 맡아 목사로 시무했다. 1952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진촌교회 안에 부설 진촌유치원을 설립 교회교육의 확대에 힘썼으며, 교육을 통한 복음전파에 힘쓰기도 하였다.
박 목사는 1969년 4월 28일 서울금성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면서 32년 간의 목회사역을 마감하며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도 함께 거행하였다. 1967년에서 1973년까지 총신대학교 실행이사를 역임하였고, 1969년 1972년 어간에는 총회 주일학교 공과 발행인 겸 장년부 공과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71년 4월 16일 황해노회 100회 기념식 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4월 4일부터 5월 5일까지 대만기독교장로회 총회에 본교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1972년 9월 27일 교단신문인 기독신보 발행을 위한 동록업무를 추진해, 오늘의 기독신문 발전의 기초석을 놓았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1984, p.103 참조).
박 목사가 백령도에서 서울로 온 것은 1953년 휴전이 된 직후 10월 25일이었다. 빈손으로 상경하여 금성교회(金城敎會)를 설립 황해노회에 가입하였다. 1950년 이후 1970년도까지 박 목사는 황해노회 노회장을 6번이나 역임하였고, 황해노회 교직자회 회장을 2번이나 역임하면서 교정(敎政)의 경험을 쌓아갔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총회교육부장으로 재임하며 교단교육에도 큰 공을 세웠다.
박 목사는 문필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친히 1956년 8월 31일 은성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설립,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목회관련 저서와 설교집을 발행해 공급하였다. 은성문화사를 통해 출판된 대표적인 저서들을 보면 빛과소금(1955. 1. 30), 성신의 검(1956. 3. 5), 예수와 나(1956. 12. 30), 목양의 길(1957. 11. 18), 생명의 꼴(1958. 6. 20), 중생의 씨(1959. 9. 20), 사상의 포로(1960. 11. 15), 한알의 밀(1961. 4. 18), 피의 제단(1962. 10. 24), 성구금언 예화(1962. 5. 25), 신약설교 전집 전6권, 불의 역사(1964. 9. 30), 새예식서(1969. 5. 5) 황해노회 100회사(1971. 3. 30), 한국목사대사전 등이 있다.
박성겸 목사는 한학에도 능통하여 그의 저서는 구수한 음식처럼 많은 목회자들에게 참고서 역할을 한 교단 안에 몇분 안되는 문필가요 목회자였다.
그는 1972년 9월 21일에서 27일까지 서울 충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교단의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그동안 한생을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과 노회를 비롯 총회와 신학교 등을 위해 수고하였다는 뜻으로 전국교회가 그에게 안겨준 영예이기도 했다. 그의 이와같은 노고를 인정하며 1969년 2월 26일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훼이트성서대학과 페이스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가 주어졌다.
그가 재임했던 제57회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 안건을 열거하면, ① RES에서 본교단은 탈퇴하기를 하다. ② 그동안 시행해 오던 지역별 대회제도를 폐지하기로 하다. ③ 총신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아세아지역 출신 유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 주기로 하다. ④ 정봉조 목사를 총회 총무로 인준하다. ⑤ 총회신학대학 학장에 김희보 목사를 인준하다. ⑥ 전북 전주에 있는 바울신학교를 총회 인준학교로 하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숭회, 김창수 편, 예장총회 사무행정국 2016, p.24).
박성겸 목사가 남긴 설교 가운데서도 그가 추구했던 삶의 지표와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본문으로 ‘청심자수복(淸心者受福)’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기초로 하여 청심자의 생활에 대해 이같이 설교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생활에 반영됩니다. 마음이 부정하면 그의 행동도 불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도 생활도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이 말씀은 모인 군중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세속생활을 떠난 진선미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결한 마음 즉 청심(淸心)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요 15:3)이라 하셨고, 둘째는 죄의 고백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박 목사는 평생을 자신의 삶을 이 말씀처럼 살았고 성역을 끝까지 매진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 예장총회출판부 2015, p.67-69참조).
박 목사는 슬하에 네 자녀(혜선, 호선, 승선, 은성)를 두었고, 그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하고 1984년 4월 2일 74세의 일기로 사모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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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57회 총회장 박성겸(朴聖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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