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제45회 총회장 고성모(高聖模) 목사
2017/09/11 14:3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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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 당선 3개월만에 고신측 한상동 목사에게 총회장권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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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군산  출신
고성모(高聖模, 1887~1972) 목사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군산은 전라북도 서북부 금강하구에 위치한 우리나라 굴지의 항구도시로 해외로 나가고 드는 서해안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항구이며, 동(東)으로는 옥구군, 서남쪽으로는 미성읍과 옥산면, 북쪽으로는 금강하구를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접하고 있다.  장항과 군산 사이에는 현재의 대교가 설립되기 전까지는 배로만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전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찍이 들어와 여기저기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군산보다 선교사들은 목포와 전주에 이어 광주 순천에도 이미 래한하였고, 군산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은 하위렴(Rev. William B. Harrison) 부부를 비롯, Dysart Julia(1907), J-Dupuy (1938), Earle Plexandia M(1904) 등이 상주했다.
고성모가 태어난 1887년 당시의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황은 이조 말엽으로 백성들의 교육상황 또한 겨우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같은 유림들이 세운 교육기관 밖엔 없어 서민들 자녀가 정상적인 교육혜택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의식주같은 기본적인 문제만 아니라 개인의 호구지책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환경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것도 생활에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훈장을 초빙하여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었을뿐, 일반 서민이나 천민들 자녀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시대의 물결을 타고 1882년 조미(朝美) 수호조약 이후 조선사회가 개방되기에 이르자 이곳 군산에도 소위 양코배기로 알려진 서구인(선교사)들의 모습을 쉽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성모도 조선 외에도 또 다른 대륙이 있고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예수교에 관한 복음의 소식이 군산에도 전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8년 총회에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上 p.72, p.103)에 보면, <沃溝郡 地境里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全緯廉과 堂地人 崔興瑞가 協力傳道하야 信者가 稍進함으로 禮拜堂을 新築하얏고 其後 崔興瑞를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를 組職하얏고 金玉汝 高聖模가 長老로 繼續視務하니라>에 이어 <沃溝郡 地境敎會가 최흥서를 장노로 장립하야 당회를 조직하였고 그후 김옥녀씨와 고성모씨가 계속시무하고 있다>고 반복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성모가 일찌기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전수받아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 초기 고향 옥구 지경리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틀림없다.

군산 지경리교회 장로 시무 중 장로회신학교 졸업
자유주의 신학사조 방어에 앞장선 목사
제44회 총회 분열 당시 합동측 합동추진위원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총회에서 총회장 당선
전주북문교회 두번 취임 후 목회 은퇴

고성모는 전통 양반유교사회에서 탈피 기독교를 통해 신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제27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듬해 군산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군산노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북노회 노회장은 6회나 연임한 교계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59년 소위 대전중앙교회 제44회 총회에서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분리될 당시 합동측의 합동추진위원에 선출되어 교단분열의 아픔을 치료하고자 무던히 힘을 썼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교사를 위시해 한경직, 강신명 목사쪽의 총대들이 연동교회에서 통합총회를 조직해 나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며 분열의 현장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총회사진명감 제3권, 총회80주년기념사진명감출판위원회 배태준편 1995, 초판 p.1008~ 1009 참조).
이때 고성모 목사는 196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속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의 자리인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총회 총대로는 고신측에서 131명의 총대, 승동측에서 233명의 총대가 참석함으로 승동측이 당연우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괴롭고 편치 못하였다. 그가 이끌었던 제45회  총회에서 부산과 경남지역을 배경으로 한 고신(高神)측과의 합동문제가 대두되어 잠시나마 통합측의 이탈사태를 위로삼는 격이되어 고성모 목사는 노구를 이끌고 합동에 앞장서서 대업을 성취하고 같은 해(1960년)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총회 의장권을 영입한 고신측 지도자 한상동(韓尙東) 목사에게 넘겨주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역사상 가장 짧은 단명의 총회장 역사를 썼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예장통합측이 분리해 나간 상실함을 고신교단을 영입함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합동한지 오래지 않아 고신측 한상동 목사 중심으로 옛 고신측으로 환원함으로 양교단 합동의 명분이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총회 회의록에 나타나 있는 기록으로 고성모 목사는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만국주일학교 장년부공과 53면 8행 이하의 기사 중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는 문구(文句)가 확실치 못하다는 사실을 총회에 제의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 달라고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장로의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글에 자유주의신학사상이 나타남을 언급, 바울이 “여자는 조용히 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천년 전에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진술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회에서는 연구위원으로 라부열 선교사(1901년), 부위령 선교사(1898년), 염봉남 목사, 윤하영 목사, 박형용 목사에게 1년간 연구케 하고 오늘 총회에 보고토록 하였는데 그 내용(1935년 24회 총회보고)을 요약하면 첫째,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교역자는 장로회 신조 제1조를 위반되는 자임으로 우리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 둘째,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를 옛날 한 지방교회의 풍속도로 비하하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지적하고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추어 곡해(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고성모 목사는 총회 총대로써 총회에 침투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사조를 방어하는데 처음 공을 세운 총대였고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고성모 목사는 군산과 옥구 고향에서 목회하던 중 그의 생애 후반부는 전주북문교회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1955년 1월 1일 부로 전주북문교회 제2대 당회장으로 부임 사역했다. 그가 시무 중 1954년 1월 8일 정읍제일교회에서 김신일 장로가 이명하여 왔고, 그후 타처로 이임하였다가 1960년 10월 1일 다시 청빙되어 북문교회를 섬기었다.
전주북문교회는 고성모 목사(제45회 총회장)에 이어 현 시무목사인 이기창 목사가 제96회 총회장(2011년 9월)이 됨으로 한 교회에서 두 명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고성모 목사가 두 차례나 청빙받아 목회한 전주북문교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북문교회가 설립된 계기는 6.25전쟁이 발발 3년이 지나고 있던 1953년 1월 2일 전주시 금암로 195번지 최경천씨 자택에서 기장과 막 분열된 직후 박진서 장로를 중심으로 33인의 성도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물든 금암교회로부터 아무런 조건없이 탈퇴하여 순수한 성도들의 헌금으로 당시 싯가 4,000원으로 전북동 소재(현, 한진고속터미널 건너편 팔달로변) 가택 한 동을 매입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전주북문교회>란 간판을 달고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역대 교역자로는 장학산 전도사, 정기한 목사, 고성모 목사, 서기선 전도사, 성갑식 목사, 이시문 목사, 강기홍 목사에 이어, 다시 고성모 목사, 김상업 목사 이기창 목사(10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교세는 (1995년) 연 예산은 7억, 신도수 2,300명에 이르는 중형교회로 성장하고 있다(총회사진명감 제4권, 예장총회사진연감 편찬위원회편 1995, 서울 초판 p.891참조).
고성모 목사가 재임했던 예장 제45회 총회 중요결의안을 보면, ①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 합동하기로 하다. ② 예배 끝의 축도는 “있을찌어다”로 일치하게 실시하기로 하다. ③ 고려파와 합동원칙 방안 등을 결의하다.
고성모 목사는 1972년 짧지않은 85세를 일기로 후손들과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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