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감사의 사람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2017/11/16 11:3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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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감사는 삶이었다”
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1월 10일 서울 신촌 성결교회에서 개최한 11월 월례회 ‘감사의 영을 부어주소서’에서 오정호 목사가 발제한 ‘감사의 사람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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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에 나타난 감사
신약성경에는 바울 서신에 감사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감사표현의 70% 정도가 바울 서신에 집중되어 있다.(개역개정으로 판단할 때, 감사 표현은 신약 전체에 65회(63구절) 등장하는데 바울 서신에 48회(46구절), 그 나머지에 17회(복음서에 11회, 사도행전에 2회, 히브리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3회) 등장한다. 신약성경은 모두 260장인데, 복음서가 89장, 바울 서신이 87장, 기타 책이 84장으로 집계된다. 물론 각 장의 절수가 고려돼야 하지만, 대략 잡아 바울 서신이 약1/3 정도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진섭 교수/그말씀/2014년 11월 두란노)
앞의 진술된 내용으로 보건데 사도 바울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감사의 체질인 것이 틀림없다.
그는 마치 시인의 시가 읽는 이들의 감정 이입으로 말미암아 시다워질 수 있듯 사도 바울의 삶을 한편의 시라고 할 때 고조된 감사로 감정이입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면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가졌으리라
사도 바울은 마치 투수가 공을 던졌을 때 타석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공이 오기를 기다리던 타자가 찬스를 결코 놓치지 않고 힘차게 쳐내는 것처럼 그는 감사를 자극하는 그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표현하는 감사자였다. 물론 그가 주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환경을 매의 눈을 가지고 살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매는 상공 1Km에서 땅에 기어가는 들쥐를 알아낼 정도라고 한다. 동일한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감사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은 평범함을 감사의 비범함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음을 안다. 아니 그가 본질적으로,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감사로 표현해야 할 그 시점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 생명의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상대적으로 그 자신의 죄성과 초라함 그리고 외식에 대하여 처절하게 탄식하였다. 자기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규정하였다. 골짜기가 깊으면 정상이 높듯이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세워진 자기 모습 앞에서 때로는 감격하며, 때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때로는 경이로움을 담아 외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2-16)

사도 바울은 감사의 체질이었다.
바울 서신 중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형식이 바로 ‘감사형식(thanksgiving formula)’이라 불리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13개 바울서신중 11개 서신에서 이런 감사형식이 등장한다.(갈라디아서와 디도서에는 예외적으로 감사표현이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이 두 서신의 배경에 무게를 둔다. 갈라디아서는 거짓복음을 따르는 자들 때문에 디도서에는 목회적 사역을 전하는데 집중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 마디로 감사체질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압도적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곧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감사는 삶이었고 그의 삶은 감사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문이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감사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감사가 멈추지 않는다. 그가 생명을 드려 개척한 여러 교회 교우들의 형편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될 때 그는 감격하였다. 그 예로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 그는 벅찬 마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
특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반듯한 신앙생활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감사함을 표하였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또한 그가 감사함으로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핍박중에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 역시 기도가 삶에 녹아져 그것이 모든 핍박을 이겨내고 딛고 일어서는 ‘성도의 동력’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고 복음적인 삶의 영적 선순환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사도 바울은 박해가운데서도 믿음의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그의 감사를 표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살후 1:3)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복음의 실체와 영광을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자기 정체성 확신의 토대로 삼음에 대하여 이 역시 감사의 제목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3)

개인에 대한 감사
사도 바울은 우주적인 감사에 대하여 민감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개인에 대한 감사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빌레몬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기저에는 빌레몬의 믿음과 행함이 놓여 있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몬 1:4-7)
굳이 심리학적인 이론을 차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경험한대로 상대에 대한 인정과 칭찬과 감사는 경계심을 해제하고 적의를 풀게 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힘이 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웅대한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인간의 죄성을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나 로마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전에 사도 바울은 16장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한다. 곧 그의 삶을 복되게 하고 눈물을 함께 나눈 동역자 들이다. 예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우리도 알건데 신앙은 윤리로 반드시 표현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관계로 반영된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신앙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매몰차게 대하는 것이다. 진리를 빙자하여 편당을 짓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의 따뜻함이 사라진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과 가장 신앙적인 것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힘께 나아가는 개념인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로마서 16장을 대필자인 더디오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불러준 사도바울을 상상 할 수 있다. 아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떠올려 입술로 표현할 때 그의 마음은 한없는 감사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복음을 위한 동역자로서 산전수전 함께 겪어낸 피붙이 이상의 끈끈한 관계가 그들의 관계 아닌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롬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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