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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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한 갑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갓난아이일 때 그의 아내가 죽었다. 그래서 아들을 양육할 가정부가 들어왔지만 그 아들마저 결혼도 못하고 병사했다. 아들이 죽은 후 마음 아파하던 갑부도 곧 뒤따라 죽었다. 갑부에게는 친척도 없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을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유서조차 발견 못해 주정부는 그의 전 재산을 국고로 넘기도록 하고 그의 저택과 소지품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한편, 갓난아이 때부터 갑부의 아들을 키워온 가정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가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 경매 소식을 들은 그녀는 돈은 없었지만 경매장에 갔다. 갖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가구라든가 비싼 양탄자 같은 것은 돈이 없어 살 수 없고 다만 벽에 걸려 있던 아들이 그린 그림만큼은 꼭 갖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가 양육한 그 아들을 사랑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 소년이 아들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그림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그림을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그림은 오랫동안 걸려 있었던 것이라 몹시 더러웠다. 그녀가 그림을 닦아내려고 액자의 뒤를 뜯어내자 무슨 서류가 방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변호사에게 전했다. 변호사가 서류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그동안 어렵게 사시더니 이제 일이 잘 풀리는가 봅니다. 죽은 갑부가 이 그림을 살만큼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다 주라는 유서를 남겼군요’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각박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왜 죽은 부자의 유산을 받아 일시에 거부가 되어 큰 화제가 되었을까? 이는 그녀가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처지를 자기 처지처럼 여기고 사랑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는 이처럼 어려운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처소에서 당신의 긍휼을 행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다.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 우리를 만나는 사람에게서 ‘당신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란 고백을 들어야 한다. 어디에서 얼마의 시간을 만나든지 우리를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이는 말투가 느릿느릿 해지고 걸음걸이가 조심스럽게 변하거나 가장하거나 거룩한 척, 아는 척 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처럼 가난한자, 병든 자, 실패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마음을 쏟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곧 그들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한다.
그런데 요즘 주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판이 곱지 않다. ‘자기네들 밖에 모른다’라는 말이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도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사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조세프 황제가 비엔나 공원을 일반 백성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했을 때 모든 귀족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유는 자기들끼리만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 이었다. 그때 조세프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밤낮 황제의 묘에서 조상들과 함께 지내야 하겠구만... 그런데도 우리는 끼리끼리만 친하게 살아야 할까? 혹시 우리들도 이 귀족들 같이 친한 성도들끼리만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교회 성경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의 귀족화라고 했다. 성도들 간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성도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점점 잃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타내야한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그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웃의 궁핍함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것을 베풀어 궁핍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 곧 베풀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 주님이 우리에게 그 긍휼을 뻗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 처지가 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자기도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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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갑부의 유산을 받은 한 가정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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