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정치참여
2017/12/14 17:4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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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법치·민주주의 발전 통한 민족국가 형성 기여
본고는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지난 12월 1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 ‘해방 후 한국정치와 기독교인’ 중 박창훈 교수의 원고 ‘종교개혁과 기독교의 정치참여’ 중 ‘종교개혁과 국가’ 부분을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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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과 국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인들의 국가의식을 고취했다는 평가는 다분히 현대적인 국가개 념을 거꾸로 덮어씌운 반역사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루터는 단지 작센지방의 수도사였기 때문이 다. 물론 루터에게서 현대 “독일”에 대한 의식을 찾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나, 그가 사용하는 언어 를 통해 구별되는 통치지역에 대한 의식은 분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국 가개념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그 발전과정에서 민족국가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만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 법치주의
중세가 허물어지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교황의 정치적 위상과 의미는 축소되는 과정을 겪었다. 아울러 교황과 함께 그를 옹호하려는 전통적 권위였던 황제에 대항하게 된 개신교(프로테 스탄트)는 이제 근대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제기된 세 속권력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그만큼 세속권력의 상대적인 성격을 드러냈으며, 이는 교회가 하나 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세속권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루터는 독일인이었다”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항상 흥미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독일어 성경번역에서 보듯이, 황제 한 사람의 통치를 대신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은 아직 성숙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지역 통치자에 대한 기대로 인해, 교황의 역할 만큼이나 황제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황의 타락에 대해서, 중세부터 계속되던 “공의회주의”(conciliarism) 가 루터에 의해 더 강화된 것과 같이, 황제에 대항하여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라는 정치적·군사적 동맹이 나타났다. 이 과정을 통해 종교개혁가들은 국가가 근거해야 할 법치주의의 근거를 제시했는데,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16조는 “공무(세속권력)에 관하여”(Of Civil Affairs)를 다 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세속권력들에 관하여, 그것들은 시민의 사역이 하나님의 선한 일처럼 정의롭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무를 담당하고, 재판에 참석하여, 제국의 법과 현재 적용되는 법들에 따라 사무를 결정 하며, 올바른 벌을 내리고,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여, 병사로서 행동하며, 합법적인 거래와 계약을 하고, 재산을 유지하며, 공무원이 요구할 경우 맹세를 하고, 아내와 결혼을 하거나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공무를 금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그것들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믿음이 아니라, 공무를 저버리는 것을 복음의 완전함이라 여기는 자들도 정죄한다. 이는 복음이 마음의 영원한 의로움을 가르치기에 그렇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commonwealths)의 명령이나 통치를 불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명 즉 우리가 사랑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계명처럼, 그러한 것들을 보호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떤 죄를 짓도록 명령하는 때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에(행 5:29),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권세자와 법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여기서 “제국의 법과 현재 적용되는 법들에 따라”는 분명히 세속 권력에 대한 의무와 공무의 근거가 법이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루터가 염려하는 또 다른 종교개혁의 줄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재세례파들인데, 정부에서의 공무직 자체를 금지하던 자들이다. 루터는 이들의 지나친 이분법적인 세계관과 그에 따른 과격한 분리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즉 두 세계 또는 두 왕국을 구별할 수는 없고 두 세계에 함께 속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해가 루터의 생각에 드러난다. 이제까지 루터는 1524년부터 1526년 사이에 있었던 독일농민전쟁을 지지하지 않았기에, “군주들의 시녀”였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위의 신앙고백에서 보듯, 루터는 정부에 대하여 맹목적인 복종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정부가 죄를 짓도록 한다면, 예를 들어 신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부당한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 따르지 않을 근거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 고 있다. 세속 정부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기구일 뿐, 그렇지 않을 경우는 그에 저항할 수 있다. 실제로 루터는 “작센 군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황의 군사적 지지자인 브라 운슈바이크 공작을 체포했을 때, 그를 석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자신의 판단을 전 하면서,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하려는 독일 군주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였다. 단순히 농민을 지지했기에 더 급진적이었고(Thomas M  tzer), 군주들을 지지했기에 더 보수적이었으며(Martin Luther) 그래서 결국 루터가 독일 제 3제국의 형성에 기여하는 신학을 제공했다는 해석은 극복되어야 한다. 카터 린드버그가 반론하듯이, 토마스 뮌처는 신정통치라는 중세시대의 세계관으로 돌아가서 선택된 이들로 통치되는 국가를 생각한 만큼 반동적이었지만, 오히려 루터에게는 개인의 이성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급진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루터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권력, 타락한 권력에 대하여,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늘 상기시켰으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칼을 받은 이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율법과 은혜를 대조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강조할 때도, 루터는 율법의 3가지 기능, 즉 첫째 죄악된 행동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징벌을 강조하고,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하며, 마지막 셋째,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할 행동들을 교육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특히 첫째 기능에 따라 루터는 형사적 처벌을 위한 법의 기능을 강조했다. 

2. 민주적 대의제도
루터의 두 왕국론 이후에, 교회와 세속 권력은 항상 두 기관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논의 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양측에서, 적어도 교회내부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논의와 실험을 촉진시켰으며, 결국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 및 대의제도가 교회 안에 정착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본적으로 봉건적인 형태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제 교회 형태 를 따른다. 감독제는 개신교 가운데 잉글랜드 국교회와 미국의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체제 (polity)이다. 이는 감독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칼빈을 통해서 제네바 에서 추진된 교회체제는 감독이 없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 평신도들의 기능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목사는 설교를 담당하며, 시내 목사회에서 선정하여 시의회에 천거하고 개교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되었다. 장로는 교회의 정치와 치리를 맡았 으며,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집사는 교회의 회계와 구제를 담당하였다. 제네바의 모든 시민이 교인이었으니, 이 체제는 교회만의 체제가 아니라, 도시국가 자체의 정치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제네바의 윤리적인 지침을 주기위하여, 평의회(당회, consistory)를 구성했는데,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이루어졌다. 장로는 시의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으며, 1주일에 한 번 씩 모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장하였다. 평의회의 결정은 지도 감독만이 아니라 처벌을 위한 법정에 영향을 주었다. 신정정치를 표방한 칼빈의 교회제도는 실제로는 제네바를 대의제도를 통해 운영하는 것이었다.20) 칼빈의 장로제는 이후 잉글랜드 국교회로부터 분리된 청교도들에게서 더욱 민주적인 발전과정을 겪었다. 목회자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선택받았으며, 특히 은혜를 입은 신도들은 교회 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목회를 하며, 교회의 생활과 예배를 결정하였다. 영국에서 이 청교도들은 1640년대에 의회의 다수를 이루게 되었으며, 장로제를 통하여 영국 교회를 보다 철저히 개혁하려 고 하였다. 이후 청교도 혁명은 영국의 왕 찰스 1세를 처형하는 결정을 가져온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으며, 그만큼 절대군주를 거부하고 공화정을 이루는 정신적인 근거를 청교도들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의 장로제는 올리버 크롬웰의 집권 이후에 회중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국가종교 를 부정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회체제였으며, 이는 장로제보다도 민주화된 형태의 교회체제였다. 즉 신자들의 교회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공동체였다.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체제를 매개로 구현된 정치형태는 민주적인 발전을 겪었고, 이는 국가적인 민주주의의 성숙과 병행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민주주의의 확장에 일 정 정도 기여하였다. 개혁주의에서 두드러지듯, 종교개혁은 대의제도를 통한 평신도들의 참여를 확대하였으며, 장로제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하여 평신도들의 참여의 기회는 그만큼 늘어났다. 그 리고 민주화 과정은 시민의식의 성장을 통해 구체화 하였으며,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등장으로 꽃 을 피웠다. 아울러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성례에 의하여 진정한 신자를 구별하던 방식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인의 체험과 양심의 판단으로 맡겨지는 만큼 민주화하였으며, 이제는 개인적인 신앙체험, 즉 “확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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