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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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여 하늘로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린 것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때, 이는 분명 시편 2:7의 말씀과 연관된 구절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삼하 7:14; 시 89:26-27).
또한 그는 분명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새아담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다(사 7:14; 9:5-7; 11:1-3; 6-10). 따라서 예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위로부터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 3:17)라고 말한 것은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말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새아담이라면 그는 당연히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자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 곧 메시야 되심의 자격을 검정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복음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릇 모든 지도자들은 그가 위로부터 수여받는 직분을 시행하려고 할 때 인사말로 앞으로 자기가 할 일에 대한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천명하는 것은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이 해야 할 마땅한 순서이다. 예수님은 그가 받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하여 앞으로 그가 메시야로서의 해야 할 일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방법을 제시하는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시험은 식욕을 시험하는 것이다,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이 보다 더 달콤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이 시험을 물론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시험이다. 뱀도 아담에게 바로 식욕을 유혹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음직 했다”(3:6)고 했다.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먹고 싶은  유혹을 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옛 속담에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이웃집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배고픔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요한 1서에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육신의 정역, 눈의 욕망, 이생의 자랑”(요일 2:15)을 들고 있는데,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탐하는 목록이고, 창세기나 요한1서에서 서로 병행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을 얼마나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의 필요성을 정제하시고 영의 양식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40일을 금식한 극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먼저 찾고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의 복음 사역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서 헐벗고 굶주린 그의 동족들에게 아무리 현실이 비참 할지라도 먼저 살기가 힘들어도 육신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하고, 돌들로 빵을 만들겠다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땀 흘려 일하여 먹고 살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첫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두번째 시험은 명예욕이다. 자기 과시욕이다. 아담은 유혹의 열매가 보암직했다고 했다. 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사람의 눈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전시욕에 사로잡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지혜롭게 대답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말씀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예수께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한다. 그러면 시편 91편 11-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천사들이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떠받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성전은 요사이 웬만한 빌딩 10여층 정도 높이였다. 여기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그를 받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전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메시야를 향하여 경배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메시야로 인정받고, 온갖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을 것이다. 구태여 고생하며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쉽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자신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믿기를 원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자신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정체를 스스로 밝히셨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쉽게 성공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누릴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귀 권세나 명예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나를 지켜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는 소유욕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께 주겠다고 유혹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물러가라.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하셨다.”고 응답한다. 허리를 굽혀 절 한 번만 하여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쿠네요”(προσυνε、ω) 라는 말은 사람 앞에 엎드려 발이나 옷에 입을 맞추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에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나, 보통 신적 존재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자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세는 단호하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신 것이다. 마귀와의 대화나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불의한 세력을 대항하고 그들의 악을 지적하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고개 숙이고 악수 한번만 하셨더라도 좀 편한 복음사역을 하실 구 있었을 텐데, 계속 이들의 위선을 들추어내고, 헤롯대왕을 향하여 여우같은 간교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질타하셨다. 세상 나라를 얻기 위해 불의한 세력들과 손을 잡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불의의 세력과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손을 잡는 것은 정도가 아니고 결국은 그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는 것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마귀의 유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끝내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갔다.”(눅 4:13)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올 것이다.
마귀의 시험은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시험은 앞으로 예수께서 하실 복음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도 식욕, 명예욕, 소유욕 등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 욕심을 불의한 쉬운 방법으로 채우도록 부채질한다. 그러나 땀을 흘리지 않고 얻는 빵, 수고와 고난이 없이 얻어진 명예,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여 얻어진 재물은 그에게 영광을 안겨 주기는 커녕 오히려 뼈아픈 수치와 비참한 종말을 가져다 줄 뿐이다. 마귀의 유혹은 한번 이겼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대문 곁에서 올가미를 가지고 우리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식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배우려고 힘을 쓰는 것 보다는, 우리들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마귀들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려고 힘써야 한다.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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