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교회의 정체성과 기독교언론
2018/05/18 16:0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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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언론은 복음에 대한 ‘창’과‘방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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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사에서 현시대만큼 언론의 역할이 증대된 때는 없었다. 인류사회가 지금 누구나 어디서든 실시간 정보를 시시각각 접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에서 방송으로, 방송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다시 인터넷으로 발전해 온 매체가 이루어놓은 언론의 쾌거이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언론을 통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1. 한국기독교의 언론상황과 그 위치
한국의 언론자유는 매우 신장되어 있다. 그러나 특수언론 등록제도에 의해 허가된 ‘종교방송’이나 ‘종교신문’은 정치적 기사를 보도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익히 아는 대로 기독교계에는 4~5개의 케이블 TV와 위성방송, 라디오 방송(산하에 다수의 지방 방송이 있음), 인터넷방송 등이 있고, 또 기독교를 대변한다는 일간신문도 있다. 그리고 100여 종의 주간신문(격주간 등 포함) 등이 있다. 이들 방송이나 신문 등의 기사에 있어서 그 편집, 보도 내용이 대체로 기독교 내부 문제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기독교언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높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데 교계에서 사실상 기독교언론을 대변하고 있는 주간신문의 경우, 크게 교단지와 연합지 그리고 선교단체 등이 그 목적을 위해 발간하는 기관신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교단지는 그 교단의 정책홍보와 회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 선교단체 등이 발간하는 기관신문 역시 그들 단체의 홍보지에 머물러 있으므로 언론으로 보기에는 매우 미흡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은 초교파 연합지가 그 사명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초교파 연합지’란 어느 교단이나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으므로써 경제적 영세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시장의 독자들이 신문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부족해 그저 신문용지에다 먹으로 글자가 찍혀 있으면 ‘신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교단지와 연합지를 구분 못해 한 달에 한번 정도 배달되는 교단회보를 받아보면서 ‘나도 교계신문 하나 본다’고 말한다.
 
2.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언론
현대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현대인이 처한 이 다원주의사회가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즉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뜻한다. 이 상대주의가 종교세계에 들어와 종교다원주의를 낳았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졌든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절대신념체계를 갖는다. “내 종교는 옳고 네 종교는 틀렸다”는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종교를 절대화 할 수 없다는 것이지, 종교다원주의가 ‘종교는 모두 같다’는 종교혼합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상대의 절대신념체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또한 상대가 나의 신앙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기대하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다원주의란 미명하에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한 채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오히려 종교간의 혼돈과 갈등만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똑같이 이 사실을 증언하되, 그들의 생각과 판단도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종교패권주의화 하거나, 또는 타종교가 기독교를 무시하는데 대해서는 기독교언론이 이를 바로 잡고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요즘 소위 진보적 언론을 자임하는 일부 기독교매체 가운데도 기독교의 호교(護敎)보다 오히려 ‘개혁’(改革)이란 미명하에 기독교 내부의 약점을 들추어 공격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언론도 있다. 이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

3. 교회의 정체성과 언론의 역할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건이나 또는 교회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목회자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언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를 방어하는 교계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교계언론이 중요하다. 신구약 시대를 통털어서 특히 문서운동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의 예언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구두 예언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서 예언자이다. 구두 예언자의 예언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으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왕사(王史)에 몇 줄씩 인용된 내용뿐이다.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위대한 선자자들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서 예언자들의 예언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그대로 남아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문서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 역시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미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언론을 통할 때 비로소 그 교회 울타리를 넘어 전국교회 또는 우리사회에 보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 기독교언론의 역할과 사명 역시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보호하는 호교(護敎)와 선전(宣傳)에 있다. 호교는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선전은 내부의 복음을 외부에 전파하는 ‘창’의 역활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이다. 한국교회는 영향력 있고 제대로 된 기독교언론을 육성할 책무가 있다.
사실 지금의 한국교회 정도면 신문은 조중동 같은 주류를 대변할 만한 일간지가 한 개 정도는 있어야 하고, 방송은 MBC나 SBS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방송매체가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 정체성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물신숭배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교계언론의 사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우리사회에 만연한 순수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이미 한국사회는 ‘돈’(Mammon)이라는 유사신(類似神)을 숭배대상으로 찬미한 지가 오래이다. 여기에 교회마저 비판없이 함께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복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섬기는 신(神)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일찌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비신화화 되고 비인격적 힘으로 바뀐 수많은 고대 신들이 무덤에서 나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고 그들 사이에 또다시 영원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말한 그 고대 신(高代神)들은 맘몬이라는 물신(物神)을 두고 한 말이다.
기독교언론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교되고, 목회자나 교인들이 물욕을 버리며, 정직한 삶을 살 때, 기독교의 정체성은 저절로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설교를 하는 기독교,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 살아나오지 않은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믿습니다. 아멘”의 기독교는 싸구려 은혜에 매달려 있는 낮은 수준의 기독교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한번 콧김으로 ‘후-’하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말 가라지인 것이다.

4. 교계언론인의 자세
교계언론인은 예언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언자는 자기의 유익을 따라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지와 하나님의 공의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권력과 충돌하기도 하고, 종교적 기득권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교계언론인의 사명이 예언자적 사명이라면 예언자가 겪은 고난도 함께 따르게 되어 있다. 때로는 자신이 쓴 기사로 인해 고소고발도 당하게 되고, 심지어 원치 않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계언론인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복음을 변증하다가 감방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일제 시대나 군사독재 시대도 아닌데 교계언론인이 감방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계언론의 위치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의 언론관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왜곡과 불의와 부정이 있는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다가 권력과 충돌하고 교권과 부딪친다. 그러면 자연히 신변에 위협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교계언론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교계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그만 두어야 한다.
끝으로, 개 교회와 교계언론은 두 바퀴처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비대한데 교계언론은 빈약하다. 그러면 한쪽 바퀴가 너무 작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빙빙 돌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교회는 교계언론을 지원하고, 교계언론은 교회를 보호하는데 힘쓰야 한다.
나는 믿는다. 교계언론이 바로 서면 한국교회가 바로 되고, 한국교회가 바로 되면 한국사회가 개혁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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