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이 가져온 비극
2018/08/23 15:3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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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번영을 누렸으나, 전제 군주 솔로몬이 죽자 불만을 가진 정치세력에 의해 왕국이 분열했다. 북쪽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남쪽에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중심한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아 ‘유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왕궁과 성전을 비롯,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남 유대 예루살렘에 있었다. 처음부터 비정통성에 의해 시작된 북 이스라엘 왕조는 거듭된 혁명에 의해 8번이나 바뀌었다. 당연히 사회는 불안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그러다가 끝내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때 남 유다는 앗수르에 봉신 관계를 유지하여 완전 정복은 면했으나, 예루살렘에는 앗수르 문화가 흘러들어와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전반이 친앗수르 정책으로 넘쳤다. 심지어 성전에는 앗수르의 국가 신(神)을 위한 제단이 만들어지고, 여호와 신은 제2차 신(神)으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착수했다. 이는 이사야와 미가 등 예언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바도 있지만, 북 이스라엘의 종교적 혼합주의가 가져온 종말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성전의 앗수르 종교의 의식용 제단을 철거하고, 앗수르와의 정치적 종속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자 앗수르는 701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유대를 침공해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다. 유대는 앗수르가 요구하는 조공을 받칠 수 밖에 없었다. 히스기야는 내탕고의 금은 보석과 성전기둥에 입힌 금과 은까지 벗겨서 앗수르에 받쳤다.
◇그런데 강대국 앗수르도 새로 일어난 갈대아 왕조 신바벨론에 의해 610년 제국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남쪽의 애굽이 병력을 동원하여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것처럼 하다가 시리아와 팔레스틴 땅을 치기 시작했다. 압제자 니느웨(앗수르의 수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유대의 백성들은 그 기쁨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정복자에 의해 탄식과 불안으로 대치되었다. 애굽은 봉신 관계를 맺은 유대 왕을 마음대로 세우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했다. 하박국과 예레미야 등이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 등장한 예언자이다. 그러나 애굽의 지배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팔레스탄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유대는 항복했다. 모든 재산과 보물은 약탈당했다 그리고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유대의 고위층들은 바밸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1차 유배였다.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음에도 이웃 국가들(에돔, 암몬, 모압, 두로, 시돈)의 부추김으로 인해 바벨론에 봉기를 들었다. 당시 예레미야는 이러한 왕의 정치적 판단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반국가적 반역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예루살렘 성벽은 1년 반동안 포위된 가운데 586년 여름에 끝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은 약탈을 당하고 방화되고 성전은 불탔다. 그리고 유대 영토는 바벨론의 총독이 통치하였다. 왕국의 분열이 가져온 비극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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