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10-1.jpg
 생음악(生音樂)이라 했었다. 녹음된 음악이 아닌 연주회장에서 듣는 음악을 일컬어. 1950년대에 20대를 누린 세대는 음반을 통해서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세대보다 몰입했었다. SP와 LP를 거치고, 하이파이에서 스테레오, 그리고 CD와 DVD를 거치면서. 이젠 녹음 기술이 너무나 발달해버려서 생음악 보다는 디지털 기술로 합성한 음향이 듣기에 따라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음반이 없었다면 그 심오한 소리의 세계를 모르고 살 뻔했을 터이니.     
그런데 늦바람이 난 것이다. 나이 80을 한 참 지나서야, 그것도 보청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연후에야, 기어이 본고장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생음악으로 듣기로 작심했으니. 마침내 소원을 풀게 된 당일, 빈 필 연주회장에는 나처럼 백발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네들이 적잖이 눈에 뜨여서 반가웠다. 무대에서 6번째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는 들뜨고 있는 자신을 달래노라 등에 땀이 고였다.   
베토벤(1770-1827)이 <교향곡 제 9번>을 쓴 것은 54세, 젊어서부터 난청으로 고생하던 그가 그나마의 청력도 잃고 건강조차 좋지 않아서였다. 후원자들이 찾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를 떠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음악계는 롯시니의 밝고 경쾌한 오페라가 판을 치고 있어서,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장년기의 베토벤은 운명에 맞서보려는 격한 작품들을 내놓았고, 40대 후반부터는,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이 보여주는 대로,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곡들을 썼다.  
그러나 베토벤이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이는 송가>에 곡을 붙이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오래전 본 신대부터의 일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직후 고양된 분위기를 맛본 청년 베토벤은 “자유”와 “환희”가 서로 어울리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나이 54세가 되어서야, 즉 눈을 감기 3년 전에야 <제 9번 교향악>을 완성한 것이다. 아마도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면서 인생과 예술에 대한 투지를 불사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로망 로란은 베토벤이 정신적으로 고양될 때마다 거의 틀림없이 “환희의 멜로디”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고 말했었고.
빈 필 무대에 지휘자가 올라섰다.  
1악장. 도입부. 빈에서 빈 필이 연주하는 1악장의 도입부. “신비”란 단어 말고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일찍이 프루트벵글러가 “우주창조”로 비유했다던 그 부분 말이다. 음반으로 들을 경우, 4악장을 재촉하노라, 건너뛴 적도 있었던 1악장이 이렇게도 신비한 메시지로 다가올 줄이야. 보청기를 쓰고 있는 이 늙은이의 귀에 말이다.   
2악장. 짧지만 더 없이 극렬한 음향들, 팀파니의 처절한 울림이 온 몸을 흔들어 준다.
3악장. 다시 찾은 고요. 로맨틱한 주선율, 그러다 4악장의 길목을 다듬는  서정이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는데.....  
드디어 4악장. 현이 연주하는 저음 레치타티보를 떠 바치며 1악장의 선율과 2악장의 선율이 엎치락뒤치락 레치타티보에 밀려났다 다시 고개를 쳐들곤 하다간 다시 울리는 3악장의 선율….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환희의 노래”가 숨바꼭질을 하며 다가온다. 이젠 나는 없어진다. 소리만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난 일이지만, 소리 성(聲)자는 귀 이(耳)자가 돌로 만든 연장을 이고 있는 형국이라지 않던가. 그러니까 원래 소리는 소리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귀가 있고서야 소리 구실을 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런데 4악장을 듣는 순간 소리를 듣는 주체인 나는 없어진 것이다. 소리가 나를 삼켜버린 것일까. 그래서 보청기의 구실을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하여튼 “O Freunde! nicht diese Tone….”(친구여 그 곡조가 아닐세….) 이후로는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 “그 곡조가 아닐세...”하는 너무나 엄숙한 부정. 그 부정을 받아서 응답하는 합창과 독창, 그리고 피날레….  
하긴 1824년, <베토벤 교향곡 제 9번>이 초연되었을 때도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 자신이 지휘했다고 하지 않는가. 정작 지휘를 받는 단원들은 베토벤 곁에 서있는 부지휘자를 따랐다지만. 연주가 끝나자 감동한 청중의 터질 듯한 박수를 듣지 못하는 베토벤. 알토 가수가 손을 잡아 청중석을 돌아보게 하자, 청중들이 열광하는 모습에 베토벤은 얼을 잃을 뻔 했다지 않는가.
enoin34@naver.com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보청기를 쓰고 베토벤을 듣다니…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