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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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살고 있는 하늘에서 낮고 낮은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낮은 땅에 오신 목적은 구원이다.(Salvation of human and nature=Universal)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은 방향이요, 진리는 본질이며, 생명은 목적이다. 예수의 삶의 요약은 첫 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요, 악의 세력을 추방하는 일이며,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이고, 말씀을 통해서 제자를 삼는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썩고 병들고 죽은 생명들과 역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해 가는 일이다.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은 개인과 영혼의 구원을 말하고 진조적인 교회는 개인과 실존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사회와 역사적인 구조악과 불의와 부패 비리가 만연한 사회를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전인적(영혼과 역사, 개인과 사회)구원을 강조한다.
성서는 에덴동산(기쁨의 동산)에 있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 먹은 불순종을 원죄로 규정한다. 칼 바르트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고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그는 아기 역시 “악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였다. 바울과 함께 어기스틴, 이후 루터, 칼빈과 바르트의 소위 개혁정통교회(Church of Reformed)는 성서의 원죄를 인정하고 있다. (루터교회는 개혁교회 와는 교회사적으로 구별하긴 하지만) 우리는 교회사적으로 초대 교회 이후,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 이래로 로마의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후의 기독교와 교회의 타락, 특히 중세(5세기부터 15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까지의 타락한 교회를 말한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에 의한 성직자의 매매와 독점, 교회 안의 성적 폭력과 인간들의 거룩의 위선된 이중적 현상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와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자본주의 파묻혀 심지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의 탐욕과 쾌락의 도구로 삼아서 신을 상품화 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세계사들 속에서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과 소위 분단 극복의 평화 프로세스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복음을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교회가 권력과 자본에 아부와 아첨, 혹은 공생과 기생을 해 오면서 분단을 매개로 한 거짓 된 종교적 행위로 밥벌이를 해 왔다.
과연 한반도에서의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들 각각의 개인적 실존과 한반도에서 온전한 구원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은 무엇인가? 그 실체들을 명확히 밝혀내고 그것들의 복음의 능력으로 추방해야 한다. 얼마나 물질과 황금을 쌓아야 탐욕의 창고를 채울 수가 있는가? 얼마나 화려한 교회당을 가져야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가? 성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해 준다. 우주적 파멸과 물로써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핵전쟁과 무서운 살상무기들,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 하천과 바다 강의 오염, 미세먼지와 지구 온난화 이 모든 인간의 욕망의 결과로 빚어진 재앙들을 인간의 이성과 학문을 통해서 극복할 수는 있는가? 인공지능의 소위 4차 산업까지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는( 예. 구글) 세력들에 의해서 세계의 민중들을 거짓된 삶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반도의 평화의 완성은 결코 쉬지 않은 길이다. 미국을 축으로 하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 유럽 등 그들 자국의 이익과 이해관계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 주범은 미국이다. 아니 중국도 될 수 있고 우리의 희망을 짓밟고 질투해 온 일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악과의 투쟁에서 승리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고난과 고통, 몸부림의 실천에서만 가능하다. 생존을 위한 고도의 전략과 우리 자신들의 몸을 던지는 곳에서만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다. 지구 남북의 양극화와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양극화, 그리고 이 대한민국에서의 양극화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아야만 가능하다.
평화와 통일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악한 세력들의 발악과 시기와 질투를 이겨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 싸움과 투쟁에서 주저앉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악의 세력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평화와 통일, 부활과 구원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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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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