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복총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
2018/11/30 13: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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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적대각성운동’ 미국정부의 대한 인식 교정
본고는 지난 11월 22일 한국복음단체총연합회가 개최한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김명구 교수가 발제한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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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의 한국포기와 그 이유
1880년대 한국을 방문한 대개의 미국인들은 외교관과 선교사들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한국을 찾은 미국 사업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선교사들과 달리 외교관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7년가량 체류했다.
이들은 조선을 면밀히 관찰했고, 조미수호조약이 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에 대 해 소극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미국의 이익에 이바지 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었다. 미국의 대(對) 조선과의 수교 목적은 미국의 국가이익이었다. 안전한 항로의 보장과 경제적 이익 을 위해71) 적극적으로 조선의 개항을 실현하고 공사관을 개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약한 의존 관계(a poor reliance)”를 확인했고, 따라서 무관심과 소극적 정책으로 후퇴한 것이다.72)  이들의 외교적 판단은 미국의 대(對) 조선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미국을 통해 일본과 같은, 강력한 근대국가를 꿈꾸었지만 미국은 조선을 지원해주어서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을 계기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해 9월 러시아와 포츠머쓰 (Treaty of Portsmouth)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 치”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79)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은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00년,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시베리아, 북만주를 차지한 러시아와 대치시키자면 일본이 한국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80) 고종 황제는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미수호 조약 당시의 원조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19세기 당시, 한 국가가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에 의해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국가의지(state will)의 존재, 곧 적대적인 세계에 대해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그 지위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문명국가인 대한제국을 보호한다 는 명분으로 침탈했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미국정부와 미국사회의 변화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은 한국교회 비정치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한국을 버리고 떠난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해 일본과 대립하게 했다. 미국교회를 자극했고 미국정부의 대한(對韓) 인식을 교정하게 했다.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일본 우선의 정책에 교정을 하게 한 것이다.
나는 올해 한국을 방문한 많은 유명인사들 중 한 사람에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어 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평양에서, 5-6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한 주일을 보냈는데, 그는 “원더풀? 원더풀!”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들과 선교회 총무들뿐만 아니라 여러 신문 특파원들과 사업가들도 그 사실에 동의를 하 며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놀라운 결과에 경이를 표하고 있다. 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한국인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어(John Z. Moore)는 1907년 영적대각성의 결실을 확인하고 싶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한 국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언론계와 경제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의 말대로 세계 거대신문의 특파원들이 한국을 찾았고, 세계 명사들의 방문도 넘쳤다. 이들은 영적대각성 운동의 결과와 선교의 결실, 곧 복음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 고 싶어 국권이 상실된 나라를 찾은 것이다.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사도적(使徒的) 기독교가 되살아났다며 흥분했고 한국이 아시아의 “지배 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소박한 예배당에서, 수천 명씩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들에게 한국은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였 다. 국제정치적 이득을 위해 한국을 버린, 미국정부와 다른 생각이었다.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대였고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간극을 뚜렷이 구분하던 시대요, 사회 진화론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식민지에서의 불합리한 일들이란 흔한 일이었다. 한국의 문제가 주목을 끌 수 없었고, 기독교에 관한 일 지라도 다른 기독교 국가 정부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은 서구 세계로부터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일본의 식민지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도 일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가혹한 현실을 보려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일본의 처신에 대해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 랫 박사 부부가 이토오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한국에 두어 달 머물며 “교육과 윤리”를 주제로 강연했을 때도, 일본인들이 한국 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12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월간지 아웃룩( The Outlook )은 1912년 12월 4일자 기사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동양 각국에서 중대한 범죄 사건으로 인해서 재판 처벌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일본 도쿄나 중국 베이징에서는 각기 자기 국민들을 감금하거나 징역에 처하기도 하고, 혹 교형이나 참형에 처한다.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관계만 없으면 서양 각국들은 전혀 상관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한국인 123명의 재판 사건으로 인해 동서양 각 국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통상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던 미국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문제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미국사회를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 국문제가, 미국교회를 통해, 미국사회와 미국정계의 이슈가 되었다. 1907년 운동의 결실만큼 뛰어난 선교 결과를 가져온 예가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교회의 업적과 자랑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어떻게 한국교회가 평가되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특별히 택해 서, 동양 처음으로 기독교 나라를 만들어서 아시아 주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사명을 맡기려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때에 한국교회를 돕는 것이 장차 일본과 중국을 문명화시키는 기초가 된다고 하여 각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 월보, 잡지에 한국교회 의 소식이 그칠 때가 없으며 교회 순례자들의 연설이나 보고에 한국교회에 대해 칭찬 하지 않는 것이 드물 정도이다.
이승만의 말대로 미국의 신문과 잡지는 한국교회의 성과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그는 1907년 이후에 변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하고 있다.
국제 정치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졌고 잊히고 있던 존재였지만, 한국교회 선교의 결실을 보고 싶어 적지 않은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대개 이들은 재한 선교사들의 집에 머물며 통역과 안내를 받으며 한국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한국 교인들의 집을 방문을 했다. 이들이 알고싶어 했던 것은 오직 한국교회 부흥 이유였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 상황도 알게 되었고, 한국의 정세와 여러 상황도 함께 분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분석대로 한국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서구 기독교 세계로 알리게 되어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서구 기독교 사회로 전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한국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따라 서 일본은 가혹한 정치와 자신들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이를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과 미국교회와 연결시킬 줄 알았고, 미국정계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1907년을 시작으로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도 비밀리 에 미국교회에 전했다. 미국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당수의 미국교회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 했다. 1940년대까지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되었다. 1902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조선을 포기했고 일방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그러나 재한선교사들에 의해 양국간의 관계는 이어졌고, 오히려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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