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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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성경은 물론 수많은 문학 작품과 철학 서적을 읽었고, 수천 시간을 사색해 왔다. 당신을 찾기 위하여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였고, 2500여 권의 문예지와 전집들을 버리고 서가를 정리하였다. 제법 널찍한 벽면을 채운 가로 세로 30칸의 책장에 그동안 흐트려져 있던 책들을 분류하여 넣었다. 우선 가운데 제일 윗 칸에 신학 서적을 꽂은 후 그 아래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철학 서적을  채워 넣고, 그 좌우 옆 줄에는 소설집과 시집들을 꽂았으며, 가장자리에는 역사서와 수필집, 희곡집과 비평과 문학사 관련 서적을 넣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어 나갔다. 칸트에 관한 책을 읽은 후, 구약사와 신약사, 그리고 수많은 성경 인물들을 섭렵하였다. 그러면 나는 당신을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신을 찾기 위하여 인터넷에서 천문학에 관한 지식도 쌓았다. 은하수에는 보통 2천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있었고, 그런 은하단이 또 수천억 개 더 있었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서 지구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지구 안에 이루 셀 수조차 없는 생물들이 살고 있었고, 인간도 그 중 한 종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인류가 나오기 수억 년 전에 맘모스가 살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공룡이 살고 있었다. 몇 번의 빙하기에 그 많던 생물들이 다 죽었고, 또 생겨났다.
성경에서는 말하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었다고. 그리고 당신이 빛과 어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 뭍과 바다를 만들고, 식물과 생물을 만들고,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시던 일을 마치고 안식하셨다고. 그래도 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저 수많은 별들을 만든 당신의 크기는 얼마이며, 홀로그램처럼 몸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끝없이 질문하였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하는데, 그리고 성령이 그 제자들에게 임하였고, 그 자녀들에게도 임하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임하셨는가를 자문하여 보았다.
나는 당신을 직접 본적은 없으나, 청소년 시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 털수건을 둘러쓴 천사를 본 적은 있다. 그는 내 온몸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토록 맑을 수 없는, 크고 파아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믿음이 없던 때였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대문을 나선 후 곧바로 천사임을 확신하고 뒤따라 나갔을 때에 당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난다면 나는 내 정성을 다하여 그에게 무릎을 꿇으리라 다짐하였지만, 아직까지 그는 나에게 직접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으셨다.
그 후로 나는 당신이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을 찾고 또 찾았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몸소 느끼고 싶었다. 그것이 당신을 찾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당신이 나의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마가복음』9:23에 있는 말씀이 나에게 다가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따라서 나는 열심히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라면 능히 하시리라 믿고 대학 교수직에 도전하였다. 학위를 받은 후 10년 동안 스무 군데 이상의 대학에 이력서를 내 보았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나는 문을 두드렸는데 왜 안 열리나 하고 의구심도 가져 보고,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하여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나의 실망은 너무 컸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그 시간에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생활이 5년간 지속되었지만, 그 문은 그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때 직장 선배가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님이 형제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형제의 마음을 바꾸어 다른 기도를 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교회에 다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예배 시간에 찬양을 열심히 불렀다. 처음에는 내가 30년 이상 해 온 찬양 실력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당신께 정성드려 찬양을 드렸다. 어린애가 예쁜 짓을 해야 그 부모가 더 잘 해 주지 않던가. 그러는 사이에 당신과 나 사이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분명 그것은 믿음의 성장이었다.
작가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어지고, 내가 십 년 이상 줄기차게 연구하였던 성담론에 관심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침마다 영감이 생겨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 칼럼을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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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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