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
2019/03/21 15:0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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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교회 주도의 거대한 민족 계시록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3월 8일 상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회 중 민경배 교수가 발제한 ‘3.1운동과 한국기독교회’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민  경  배 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3.1독립운동과 한국교회 참여 정도
3.1독립운동 당시 한국인은 총 1,700만명인데 기독교인 수는 26만명, 전체의 1.5%정도였다. 2016년 통계청에 의하면 현재는 기독교인구가 30%이다. 
한데 당시 총독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위 참여인원이 2백만명, 사상자가 23만4천명, 피살자 7천5백명, 불탄 교회 47동 민가 715채였다. 기소자는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25%, 입감자는 기독교인이 1,967명 곧 전체의 15%인데 그중 여자가 176명으로 9%에 이르고 있었다. 기독교입감자 중 여자가 10/1에 이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여자 입감자가 3%에 이르고 있었다.
지난 2019.02.21 [조선일보]에 따르면 국내외에 참가자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 사망자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

3.1독립운동의 기독교성
3.1독립운동 당시 전국에 격문이나 붙었다. <매일 3시 기도하고 주일엔 금식하고 한주 내내 성경을 계속 읽으라.> 그런데 성경은 월요일&#8211;토요일 매일 성경 어디를 읽으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가령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아 12장이었다.
이 위대한 성경적 신앙이 3.1독립운동의 근원적 생명이요 그 동력이었다. 3.1독립선언서 작성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라고 천명한 바가 있다. <군국주의 통제>에 대한 대결로서의 민주주의적 이념은 복음과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치였다. 더구나 일제는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이 <거의 종교적 열광으로 필사적 태도로 하였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순교적 열광을 연상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은 기독교 역사로 체계화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일제 진압자들은 어디가나 교회와 기독교인을 중점적으로 검거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있었다.
가령 <미야꼬신문> 3월 8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다. 곧 불량 선인의 소굴이라 일컬어지는 평안남도에서 1일 오후 1시부터 평양 기독교, 교회당과 학교에 약 2천명이 집합하여 손에 구 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고, 진남포 안주에서도 수백의 기독교도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살포.> 대개 이런 기사다. 기독교가 3.1독립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

3.1 운동의 세계사적 의미
3.1독립운동은 세계 역사의 조류에 올라 선 거대 운동이었다. 세계 제1차대전의 회생으로 전취한 민주주의, 자유, 인권, 민족국가, 이런 가치들이 일제의 프러시아 군국주의에 의해 한국에서 다시 소생되고 있다는 의식이 한국이나 세계에 편만하고 있었다. 참담하였다.
<독립선언서>의 핵심 주창도 세계사적이었다. 곧 정의, 인도, 인류적 양심의 발로, 세계개조의 대기운, 시대의 대세, 전인류 공존공생권, 인류 통성과 시대양심, 세계평화, 인류행복, 인류역사, 세계기운 이런 말들로 빽빽하다.

한국기독교인의 세계의식
한국교회는 그 태생기부터 세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1892년 <찬송가>에는 만왕, 만국, <끄릴난 어름산과 인도 산호섬과 아프릭 더운 내에 금모래 깔린 곳 강과 산과 넓은 들>, 이런 글들이 쌓여 있었다. 1906년 존 무어 선교사는 한국이 구원의 횃불을 드는 날 세계문제가 해결되되 제대로 해결되고 만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1907년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그 해가 정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는데도 만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과 도덕적 개혁
일제는 합병 하자마자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를 체계적으로 해체할 악덕한 시책을 펴고 있었다. 한국 인종의 멸절정책이다. 그래서 주초(酒草)를 장려하여 주초세 수입이 전체 조세 수입의 48%까지 육박하던 때가 있었을 형편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주초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가 주초법에 걸려 징역을 산 적이 있다. 공창 유곽(遊廓)은 합병직후 부터 50만불의 국비로 건설하고 있었으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던 선천에도 유곽이 들어서고 있섰다.
아편은 총독부가 예산 투입하여 재배하고 국가기관 전매청에서 팔고 있었다. 행상인도 팔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담임 중 한국인 두 분이 다 아편 중독자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또(齊藤實) 총독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불러 독립운동 이후의 한국선정 방향을 물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개혁을 요구한 것이 도덕적 패악이었다.  

역사의 미래에 대한 계시록
조선총독부와 미국 NCC의 묘한 공통 인식이 하나 있었다. <지금 한국에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아니한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이다.> 만주의 포조 신한촌의 <독립선언서> 에도 그런 희망이 비취고 있었다.  <지금 혹 힘들어도 우리의 자손들은 독립을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희망의 가락은 역사의 미래에 대한 눈부신 불길 그 봉화대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새 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는 구나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 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1920년 남궁억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란 찬송가를 부른다. 한데 그는 <기러기>란 노래를 짓는다. 짝 잃고 멀리 벽공(碧空)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나라 잃은 우리 같았다. 한데 3절은 희망의 북소리 요란하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분 계서 네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치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暖風)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당시 새문안 교회의 홍난파와 김형준이 <봉선화>를 지어 온 겨레가 소리 높이 목쉬도록 불렀다. 가울 바람에 처량하게 시든 봉선화 같은 우리지만 그러나 3절에는 화산이 터지는 듯하다. <엄동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3.1독립운동에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삼천리강산 도처에 활화산처럼 미래 희망과 약속이 하늘가에 무지개치고 있었다. 교회가 민족 그 미래의 계시록이었다.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갑작스런 발전과 부흥이었다. 기독교 학교 학생수는 전년 비 90%가 증원하고 있었으며 교회교인은 3배가 늘어난 곳이 있었다. 

3.1운동 역사 보존의 역학
출애굽기 10:2에는 역사를 보아야 우리가 여호와의 증거를 볼 수 있다는 글이 나온다. 모세 고별사에 <옛날을 기억하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란 글이 새벽이슬 같이 맑게 빛나고 있다. 기록은 신앙이다.
일본 안의 언론도 통제를 받아 3.1독립운동에 관하여 3월 7일에 가서야 보도를 시작한다. 한국 안에는 일간지 자체가 없었고, 주간지는 선교사들 것까지도 일언반구 보도가 없었다. 박은식, 김병조, 신흥우, 정한경 등이 있었으나 좀 이후의 일이고 또 비분감개로 조리가 흩으려져 있다.
한데 가장 신뢰할 만한 대담한 보고가 문서화 한 곳이 있다. 1919년과 1920년 10월 소집된 장로교제 8회와 9회 총회록, 그리고 거기 부록으로 실린 노화상황보고서들이다. 더구나 1919.10.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은 골리앗 앞에 나선 다윗 같았다. <장로교총회는 개회벽두에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본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본회로 보낸 편지를 서기가 낭독함에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일>을 인쇄한다. 이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3.1독립운동 사건을 공문화한 문서로 기념되어야할 자료이다. 그러고 나서 각 노회 상황보고인데 예언자적 품위와 용기가 거기 불 타 빛나고 있다. 전국 12개 노회가 전부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피해 상황 통계를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독립>이란 말을 못 쓰게 되어 있었는데도 교회는 오히려 보란 듯 그 말을 반복 단연 쓰고 있었다.
당시 3.1운동에 대한 보도나 피해상황에 대해 이처럼 대대적으로 공개한 곳은 교회가 유일하였다. 정의 진리의 봉화대가 여기 있었다. 그런 것이 세계사의 실록이 된 것이다.

3.1독립운동에서의 한국교회 역할
3.1독립운동은 한국교회와 떨어져 이해할 수 없는 교회 주도의 전 민족 궐기의 운동이었다. 전국적 조직이 있었기 때문인데 교회는 이런 사회적 역할에서 주도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네트워크때문에 세계사의 흐름과 세계와의 결속이 가능하여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동력 동원이 가능하였고 그런 의미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나 사회에서의 도덕성은 아주 긴요한 중추적 가치이다. 한데 일제는 한국에서 주초나 유곽 아편을 국가가 운영 판매하고 있었다. 도덕적 범죄를 총독부가 나셔서 자행하는 무도패륜의 길을 짐짓 걸어갔다.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이런 국가적 차원의 부패 배륜정책을 고발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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