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2019/04/05 11:4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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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중국서 목사되어 한국교회 재건운동에 투신
◇이 글은 지난 3월 21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기독교와 3.1운동 기념세미나’에서 김남식 박사가 발제한 “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주


3.1운동과 최재화
독립운동가 최재화는 1892년 12월 18일 경북 선산군 해평면 산양리에서 아버지 최도원과 어머니 우서원 사이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경신학교를 1914년에 졸업하고, 동경 일본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모교인 경신학교에 교사로 들어갔다.
어느날 최재화는 경신학교의 선배인 세브란스 의전의 이갑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종로2가의 YMCA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곧 있을 3.1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갑성은 최재화에게 경신학교 졸업생으로 영남출신이니 대구지방의 독립운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의기투합한 최재화와 이갑성은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세브란스 학생인 이용상과 함께 독립선언서 400매를 가지고 대구로 갔다. 이렇게 하여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8일에 일어났다.

제1,2차 ‘최재화 사건’
대구와 선산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재화는 다시 대구에 잠입하여 계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관공리들의 사직을 촉구하는 경고장을 살포하는 일과 일본에 항거하는 의미로 각종 상점들이 폐점하기를 촉구하는 경고장을 작성하여 살포하는 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최재화 사건’이라고 명명하였다.
최재화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와중에도 제2차 최재화 사건으로 불리는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또다시 주도하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무력을 기르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어서 독립군 양성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6년 6월 중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변장을 하고 다니던 최재화에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보낸 사람이 찾아와 대구 달성공원 벤치에서 그들은 비밀리에 접선을 하였다. 그의 요구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최재화는 이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상주 역에서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재화는 탈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꾀병을 부려 유치장을 나와 형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을 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의 사역
최재화가 중국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모색할 때에 일본 총독부는 이른바 제1차, 제2차 최재화 사건의 궐석재판을 실시하여 도합 징역 9년을 언도했다.
상해에 도착한 최재화는 경신학교 시절의 은사인 김규식 박사를 만났다. 또 안창호,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다.
최재화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얻으려는 계파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워 무력독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김원봉, 양건호 등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하여 ‘힘은 힘으로’라는 행동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최재화는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무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에 최재화는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다.
그리하여 최재화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경에 있는 금릉신학교를 찾아가 입학하였다. 그러나 생활비와 학비가 없는 상황에서 신학공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앗다. 근근이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하던 중 최재화는 좋은 조건으로 화북신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화북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로서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수진은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학생들도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 화북신학교의 한국인 학생은 최재화와 두 사람뿐이었다. 둘 다 남경의 금릉신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온 학생들로서 나이도 동갑이어 그들은 형제같이 지냈다.
1924년 산동성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처럼 지내던 김경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최재화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김경하는 3.1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은 바 있다.
이러한 형편이라 그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서 사역해야만 했다. 최재화는 산동성 둬이장교회의 청빙을 받아 산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산동지방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대구에서의 사역
중국과 만주에서 10여년을 살아왔던 최재화에게 대구제일교회에서 목사 청빙이 들어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헌신자의 새로운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31년 봄, 최재화는 만주를 떠나 고국행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인 최묵을 버리고 최재화로 다시 돌아왔다.
최재화가 부임하기 전 대구제일교회의 문제가 생긴 것은 1923년에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자치파 파동’이렀다. 대구제일교회의 이 사건은 경북 지방 교회들의 사건으로 확산되었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 노회파와 이만집 목사의 자치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대구제일교회 예배당 쟁탈전으로 확대되었고, 10년동안 법정 소송을 함으로써 1천여 명의 교인들은 사분오열되었다. 1931년 4월에 노회파가 3심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1931년 11월에 교회당 명도 소송에도 승소하였다.
기나긴 재판이 끝난 교회는 새 목사를 모시고 잘 믿어보자는 열의로 가득하였다. 흩어진 교인들이 조금씩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예배당의 건축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계속 늘어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자는 열정이 교인들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1932년 2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김익두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당 건축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추진되었다. 최재화는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벽돌 한장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붉은 벽돌 한장에 1원을 하엿다. 최재화는 자전거를 타고 경북노회 경내의 여러 교회를 순방하며 경북지방 모교회의 건축에 동참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기도와 눈물로 지은 교회당은 1933년 9월 말에 붉은 벽돌 2층 건물, 연건평 448평의 웅장한 모습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지은 예배당은 경북지방의 문화재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가치를 더하였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제일교회의 위상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최재화는 대구제일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꾸었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인재양성이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는 제일교회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최재화는 그 학교에서 설교할 때가 많았고, 학생들도 교회에 많이 출석하였다.
그는 계성학교 출신자들 가운데 소명 받은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켰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신앙지도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학생이 훗날 한신대학 학장을 한 이여진과 부산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민하이다. 최재화는 젊은이들을 육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들이 내일의 한국과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랑으로 돌보았다.

부산에서의 사역
1930년대가 저물어 갈 때에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는 신사참배를 통해 한국민족을 통제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여기에 대구제일교회나 최재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공교회가 수난을 당하였고,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순교하는 성도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재화는 새로운 사역지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1943년 1월 초 부산진교회로 부임한 최재화는 여기서도 교회당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일본의 강압적 통치가 강화되어 교회당 통폐합을 강행하는 형편이어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란 불가능하였다. 특히 최재화는 독립운동으로 전과가 있는 요시찰 인물이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1945년 8.15해방을 맞아 그는 부산진교회 목사로서 또 부산지방 교계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최재화는 특히 교회당 신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부산에 진주한 미군들로부터 시멘트 등 건축 자재를 도움받아 부산진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총회장으로서의 최재화
최재화는 부산진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대구서남교회로 부임하였다. 대구에 다시 온 최재화의 사역 영역은 매우 넓었다.
그는 1949년 4월9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제35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문제, 조선신학교 개혁안 등으로 교단 분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총회의 회무 진행도 어려움이 연속이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6회 총회는 끝내 회무를 진행하지 못하고 비상정회 하고 말았다.
최재화는 1954년 4월 ‘사설학술강연회 계명기독학관’을 개설해 오늘날의 ‘계명대학교’를 세웠고, 대구장로회신학교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최재화는 1959년 서남교회를 사임하고 구미 안동교회를 1961년까지 시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1962년 9월17일, 향년 70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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