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고난과 부활절의 의미 되새기기
2019/04/26 11:3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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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신앙의 완성인 부활로 이끄는 길
본고는 지난 4월 12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진행한 4월 월례회에서 한국정교회 임종훈 신부가 발제한 ‘정교회의 고난절(대 사순절)과 부활절 의미 되새기기’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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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를 통해 찾게 되는 대 사순절의 의미
1) 뜨리오디온 기간
‘뜨리오디온’은 두 가지 사항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의 3주간을 포함하면서 대 사순절 기간과 성 대주간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랜 기간을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책의 이름인 『뜨리오디온』입니다. 이 책은 평상시에는 매일 예배에서 아홉 개의 오디를 읽어나가지만 이 기간에는 세 개의 오디를 읽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이 책은 이 기간에만 읽혀지게 됩니다.
세리와 바리사이파 주일: 이 날 루가복음 18장 10절부터 14절까지에 있는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에 대한 복음말씀이 교회에서 봉독됩니다. 부활절을 향하여 신자들은 이제 영적인 순례길을 떠납니다. 이 영적 순례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익숙한 항구를 떠나 새로운 종착지를 찾아 떠나는 항해를 시작할 때에, 많은 준비물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순례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말로는 겸손이지만 그리스말로는 ‘따삐노시’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탕자 주일: 탕자에 대한 비유말씀인 루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가 봉독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 가지 더 영적인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가르치시고 명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죄에 대한 절망감과 두려움에서 구해내고 덕과 선행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적들이 펼치는 간계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입니다.
금육 주일(최후의 심판 주일): 이제 우리는 점점 더 대 사순절의 치열한 영적 투쟁의 기간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대 사순절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금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날부터 신자들은 육류로 조리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 사순절의 엄격한 금식이 시작되기 전이므로 이 날부터 일 주일간은 우유로 만든 식품은 먹을 수 있는 제한적인 금식을 행하는 유식주간(우유는 먹는 주간)이 됩니다.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 최후의 심판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에서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게 됩니까? 복음말씀에서 주신 답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나 인류와 같은 추상적인 집합체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짓고 악에 빠진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격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용서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태오복음 6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죄짓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금식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금식은 위선이나 과시가 아닌 오직 하느님께만 은밀히 알려지는 금식으로서, 우리의 타락한 욕구와 본성에 무릎 꿇지 않고 이겨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승리하여 이 세상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분열, 갈등, 증오를 없애고 이겨내어 일치, 연대, 사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즉 인간관계가 훼손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맡겨 적과 나 사이에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적과 내가 서로를 용서할 때만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2) 대 사순절 기간
대 사순절 기간의 세 번째 주일인 십자가 경배 주일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구와 정념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하고, 십자가 경배 주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에 집중하도록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전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정교 주일): 첫 번째 주일을 정교 주일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이 날 교회는 제7차 세계공의회(AD 787)에서 최종적으로 선언한 이콘반대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이콘(성화상) 공경의 회복을 기념하며, 정교 신앙의 승리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시노디콘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 예언자들이 본 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가 이어받은 대로, 교부들이 가르친 교리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 대로, 은총으로 밝혀진 대로, 진리가 확인한 대로, 거짓이 쫓겨난 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 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한 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한다. 그의 성인들을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로, 성당에서 성화로 공경한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흠숭하며 경배한다. 그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한다. 이것이 사도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교부들의 믿음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온 세상에 굳건하게 섰다. ...”
사순절 두 번째 주일(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주일): 두 번째 주일에는 14세기에 교회가 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AD 1359)의 적들을 정죄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공인한 것을 정교 신앙의 두 번째 승리로 기념합니다. 성인은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영예를 다 버리고 아토스 성산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했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여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억제하고 자신의 영을 하느님께 끌어 올리며, 모든 순간을 끊임없는 기도와 거룩한 묵상에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마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강물처럼 많은 눈물과 밤새워 올린 기도로 자신의 영을 정화하여 성령의 은사를 담은 그릇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의 기념 주일은 대 사순절의 흐름과는 다소 유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대 사순절은 예비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들에게 이 기간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아직은 예언되고 약속되었을 뿐인 새로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아직은 만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세 번째주일(십자가 경배 주일): 이 날은 대 사순절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를 경배하는 축일로 지냅니다. 사십일 기간 동안 우리는 참담한 통회와 힘든 금식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기를 되찾도록 해주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여 우리를 격려합니다. 힘든 여정의 중간에 교회의 교부들께서는 생명의 십자가를 세워놓고 우리를 쉬게 하고 새로운 활력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성 요한 클리막스 주일): 이제 대 사순절의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참회와 노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취된 사건들에 집중하게 됩니다.
요한 끌리막스 성인(†AD 603)은 ‘사다리’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끌리막스』라는 정교회 최고의 영성 서적을 쓰신 분이고 영적인 상승의 단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이집트의 성 마리아 주일): 이 날의 복음말씀은 마르코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사십일 기간 동안 나 자신을 영적으로 정화하던 모습에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에 실제로 참여하게 되도록 초점을 옮깁니다.
창녀였던 이집트의 성 마리아(†AD 378)의 삶을 기념하며 죄에 깊이 물든 사람도 회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성지 주일): 이 날 이전의 6일간은 성지 주간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 동안의 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 베다니아와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합니다.
3) 성 대 주간
성 대 월요일: 이 날은 신랑의식에서 마태오복음 21장 18절부터 22절까지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영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간들을 경계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그 잎으로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가렸을 뿐, 그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성령의 열매와는 거리가 먼 영혼을 비유합니다. 주님께서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셨습니다.
성 대 화요일: 이 날의 신랑의식은 마태오복음 25장 1절부터 13절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봉독함으로써 언제 올지 모르는 우리의 죽음과 주님의 재림을 늘 깨어있는 가운데 준비해야 함을 배웁니다.
성 대 수요일: 이 날은 마태오복음 26장 6절부터 16절까지 창녀였던 여인이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말씀 속에서 회개의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성 대 목요일: 이 날의 예배는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입니다. 마태오복음 26장 2절부터 27장 2절까지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신비의 감사의 성사를 제정하시고,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고, 유다에게 배반 당하셨습니다. 이 날 이 네 가지 사건을 기념하며 성찬예배를 드립니다.
성 대 금요일: 이 날은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난 예식에서 12개로 나뉜 복음 본문이 봉독되고, 대시과에서도 복음이 봉독되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뿐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면서 구원 받은 오른편 강도를 기억합니다.
성 대 토요일: 이 날은 주님의 장례 예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무덤에 모셔져 장사 지내고, 주님은 캄캄한 지하세계에 내려가 주님 이전에 안식한 모든 영혼을 해방하십니다.(베드로 전서 3:18-19)

부활절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믿음과 거룩한 예배와 기풍과 문화의 핵심입니다. 모든 차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적셔지고 양육되는 정교 신자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부활절(빠스카)입니다. 이 부활 경험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쇄신의 경험이고, 만물의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입니다.
특별히, ‘지극히 거룩한 날’인 주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사의 성찬예배에서,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을, 하느님 통치의 복된 현실들을 미리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참여함을 장엄하게 경축합니다. 신성한 감사의 성찬예배에 빠스카와 기쁨의 의미가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감사의 상찬예배는 언제나 기쁨과 환희의 분위기 안에서 거행되고, 그리하여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쇄신, 충만한 기쁨, 생명의 충만, 장차 흘러넘칠 사랑과 지식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종적 종말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역동적 여정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세상이 얻게 되는 구원의 종말론적 특징을 현재와 결합시켜주는 밀접하고 지울 수 없는 관계와 관련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지니는 이 종말론적 특징은, 교회의 삶에 하나의 독특한 역동성을 새겨넣어주고,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훌륭한 증언자가 되도록 자극합니다. 정교 신자는 사회적인 악에 맞서서 투쟁해야할 분명하고도 고유한 이유와 강력한 동기를 가집니다. 그는 최종적인 목적들과 매우 강고해 보이는 역사적 현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대조와 긴장을 아주 강렬하게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로 나타난 사랑(루가 10:30-37 참조)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웃이라 여기고, 가서 기꺼이 그를 도와주라.’(펠루시오스의 이시도로스)고 말씀하신 교부의 가르침처럼, 정교회는 사랑의 디아코니아, 사랑의 봉사,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정교회의 감사의 성찬예배 정신을 확장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현재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의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핵심임을 굳게 믿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또한 정교회의 전례적 삶이 ‘함께 누리는 구원’ 경험, ‘함께 누리는 자유’와 ‘함께 누리는 왕국’의 은총 또한, ‘함께 누리는 부활’에 대한 기다림으로 떨리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중시되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생명의 공동체’이고, ‘나눔과 더불어 존재함’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희생적이고 영광스러운 사랑과 일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부활 이콘, 이 빛나는 이콘의 놀라운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은 땅 속 깊은 곳에 내려가셔서, 지옥문들을 깨뜨리시고, 단지 승리의 깃발만 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를, 또한 그들 안에서 온 인류와 온 피조세계를 붙잡아 올리시고, 손수 보호하시고 강하게 하시면서, 영광스럽고도 빛나는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오십니다.
‘축제 중의 축제’, 죽음의 권세를 멸하는 전능하신 사랑인 부활의 선포는 사회적 불의, 인간성의 변질과 타락이 맹위를 떨치는 세상, 수천 수만의 피난민과 무죄한 어린이들에게 마치 골고타와 같은 이 세상 안에서, 오늘도 울려 퍼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활은 선포합니다. 부활은 시련, 고통, 십자가, 골고타가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은 그들의 비극적 희생자들에게서 결코 승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십자가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삶이 향하고 있는 최종적 궁극적 현실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완성인 부활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이야말로 십자가가 가진 참된 의미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 정교신자들은 외칩니다. ‘십자가를 통해 온 세상에 기쁨이 왔다’고 말입니다. 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예식이 슬프기만 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이 뒤섞여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수난은 ‘우리의 고통을 없애는’ 부활을 통해 접근되고 경험됩니다. 정교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이 변할 수 없는 결합은, 일반적으로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시련에는 무관심한 모든 신비주의 혹은 자기만족적 경건주의와 결코 화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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