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언론포럼/ 김대성 박사(사)휴먼니커버리 대표)
2019/06/12 13:4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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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불멸과 육체부활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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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사람의 몸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죽으면 그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당장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재림시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한다는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데, 그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 어떻게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과 설명이 매우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어떤 면에서는 설명 자체가 매우 무리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상과는 조화가 되지 않는 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이 어떻게 기독교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떤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혼불멸 사상은 왜 부활의 신앙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1.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
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 발행(1994년)한 교리교육 지침서 352, 359페이지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도 끝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속함을 주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 불멸이라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저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탄다고 생각한다. 일평생 죄를 지어 보아야 10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지은 죄 때문에 그 영혼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타고 있다면, 그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왜 어떻게 유래되어 기독교의 교리가 되었는지 그 근원을 우선 살펴 보려고 한다. 동시에 영혼 불멸 사상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에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철학적 추측에 불과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중요한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본질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이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영혼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과정에 대하여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인간은 ‘땅 표면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형성된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정의내려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 사상은 영혼을 육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이분법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 성서의 구원사적(救援史的) 문맥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육체보다 가치 있는 ‘신과 유사한 영적인 것(호모이오시스)’이며, 죽을 때 그 둘은 비로소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은 불멸을 누린다는 희랍적 사고는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사멸적인 육체 속에 불멸적인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유형의 논조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귀속되었다는 그 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을 도출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7>.

3. 영혼 불멸설의 유래와 역사
(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들이 거하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과일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 과일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말 중의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과일을 먹었고 결국 그들은 죽었다. 사탄의 말이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게 되었다. 몸은 죽었지만 ‘혼’은 죽지 않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매개자들이 성경에 나온다.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등(신 18:10)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울 왕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이 나왔다(삼상 28장). 그가 과연 사무엘의 영혼인가? 사무엘이 무당에게 불려다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간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

(2)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헬라 철학
이와 같은 사탄의 거대한 속임수로 인해 영혼의 불멸 사상은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에 매우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 불멸 사상을 대단히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무수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이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영혼 불멸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였다. 기원전 5세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집트를 방문하며 영혼 불멸 사상을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그리스도교 대사전, 대한 기독교 서회, 1118면). 죽음 직전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침착성은 영혼 불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 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은 영혼 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상동).

(3) 영혼 불멸 사상이 교리로 만들어지기까지
① 플라톤(Plato, 427˜347 BC) - 영혼 불멸 사상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다. 최대의 헬라 문화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흡수한 플라톤의 철학에 동양의 신비 사상을 혼합한 신플라톤 철학(Neoplatonism)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② 필론(Philo, 20 BC~AD 47)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플라톤의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유대교에 끌어들이는 데 앞장 섰다. 1세기 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오리게네스(Origen, c.185~254) -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3세기 초의 천재적인 교사로서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교계에 소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④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m, c.160~240) - 플라톤과 같은 영혼 불멸을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영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고 하는 영원지옥(永遠地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북아프리카 히포 출신으로 당대의 최대 신학 교부였다. 그의 가르침은 중세 가톨릭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빌려 연옥설을 만들어 냈으며, 대교황 그레고리는 서기 528년 그것을 교리로 인정하여 드디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확인된 영혼불멸 사상과 영원지옥, 그리고 연옥의 신앙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집대성 되었다.
⑦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 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신앙으로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 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이 이성적인 영혼의 속성에 관하여 그것이 죽음과 더블어 죽게 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공회의 동의로써, 영혼은…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종규에 따라, 지성적인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을 멀리 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 1937, 483,487).
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영혼 불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성서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4) 칼빈의 「혼수론」과 개신교의 영혼 불멸 사상
이렇게 이교적인 영혼 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1513년)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 칼뱅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 지 2년만인 1534년, 25세의 나이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魂睡論)을 써서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 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뱅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덜,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 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
영혼 불멸 신앙이란 이렇게도 비성서적인 이교의 철학 사상에서 시작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굳어진 교리이지만 성경을 보면 마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경절들이 도처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문제는 히브리 사상을 헬라 사상으로 변형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70인역」(희랍어 역본) 성경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다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을 단순히 동의적 평행법으로 반복 병렬시키면서 그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역본은 오히려 ‘에이콘’(형상)과 ‘호모이오이스’(모양) 사이의 엄격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희랍어 역본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호모이오시스’ 즉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비슷한 것’(호모이오시스)은 소실되고, 단지 인간적인 것, 즉 ‘에이콘’만 남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 이후에 나오는 ‘호모이오시스’(모습)라는 표현은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에이콘’(창 5:1) 또는 ‘이데아’(창 5:3)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역본은 구약성서가 인간을 플라톤주의적으로(플라톤의 파에돈처럼) 이해하여 인간이 죽을 때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나누이는 것처럼, 또는 영혼은 육체보다 더 우수한 신적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으로 오도(誤導)하였던 것입니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6, 157).
히브리적 인간 개념을 헬라적 인간 개념으로 변형시켜 번역된 「인역」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각종 번역본에서 ‘영혼’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 하야’(살아있는 영, 생령)로 되어 있지 않고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Living being)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생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김이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제는, 희랍적 영향 때문인지(?), 이 ‘네페쉬’라는 말이 우리말 성서(개역)를 포함하여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성서에서, 희랍역도 그렇게 하지 않은(‘프쉬케’라고 번역하고 ‘프뉴마’로 번역치 아니한) 번역인 ‘영혼(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적 은유로 사용한 것이나 출애굽기 23장 9절, 욥기 19장 2절 등의 어떤 특수 문맥 이외에서 ‘영혼’이라는 말로 ‘네페쉬’를 번역한 것은 명백한-혹은 의도적(?)-오역(誤譯)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상동, 158).
이와 같은 오역으로 인해, 많은 성경 독자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천당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성경절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몇 성경절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헬라어로 ‘푸쉬케’이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 마음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상 가장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려면 문장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전도하면서 당할 여러 가지 시련과 핍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하는 핍박은 최악의 경우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선교하는 정신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푸쉬케’라는 말은 다른 여러 경우(행 15:24; 엡 6:6; 골 3:23 등)에서처럼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나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영혼”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46).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위 성경절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했어야 할 부분인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본래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쉼표( , )를 ‘오늘’ 앞에 찍어 넣음으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온 것이다.
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영혼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구원을 그날 바로 약속하신 것이지 그날 그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다. 강도의 실제적인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의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면, 강도가 그 날 그 영혼이 분리되어 하늘에 갔다는 것은 도무지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이 분명하다.

(3)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

① 아브라함의 품 - 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
② 눈, 손가락, 혀 - 영혼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 - 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
④ 실화가 아닌 비유 - 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밝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 - 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5. 지옥과 꺼지지 않는 불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라고 하는 말은 12회 나타난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 48).
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엔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을까?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대하 28:1-3; 33:1-6; 왕하 23:10).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에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17:27).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했다. 그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가?
장차 악인을 멸망시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란, 불타는 시간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 수 없는 하나님의 불,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6. 부활 -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
영혼불멸을 인정할 경우, 예수 재림시 천지 사방에서 일어나게 될 부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에 있던 구원받은 영혼들이 예수 재림시에 모두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각기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육체와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에는 의인에게 일어날 ‘생명의 부활’과 함께 악인에게도 있게 될 ‘심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그렇다면 지옥에서 불타고 있던 악인들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 중에는 ‘영혼불멸’ 사상을 대입할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모순을 가리기 위하여 성경 번역을 교묘하게 해 놓은 부분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선 이 표현은 어법상 맞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은 죽은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처럼 되어 있다. “데려오다” 혹은 “데려가다”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원문(아고, αγω)을, 영혼불멸 사상에 맞추기 위해 “데려오다”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문장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해 놓았다.



이 주석의 내용을 보면,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죽은 성도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살전 4:14).
다음의 성경절들을 살펴보면 성경에 기록된 부활 사상은 그 상태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5-18).
이 성경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재림시 살아있던 자들이 죽은 자들 보다 먼저 하늘에 가지 않는다.
(2)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3) 재림시 살아있던 의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져서 공중에서 예수를 영접한다.
(4) 그 후 천국으로 올라가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영혼불멸을 믿게 되면,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구원의 과정에 매우 혼란스러운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나 유수한 성경학자들은 영혼불멸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론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로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에 순교당한 틴덜(W. Tyndale, 1490˜1536)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시켜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할 수가 없다. … 내게 다시 말해 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이와 같이 부활 신앙과는 모순되는 영혼불멸설과 연계되어 있는 영원 지옥설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작된지는 이미 오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3년 11월 15일자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타는 영원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영국 성공회도 그간의 지옥 개념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징벌의 불구덩이’로 묘사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옥은 다만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 부정과 무(無)의 상태’이다. … ‘가학적으로 표현된’ 전통적 지옥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상흔을 남겼으며, 신을 학대를 즐기는 괴물로 만들었다”(동아일보, 1996. 1.13).
현대 신학계의 가장 유명한 신약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1958년에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영혼불멸설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영혼불멸설의 가르침은 부활의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비성서적인 관념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당시 신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논문이었으며, 논문 발표 후, 그를 향한 비난과 공격은 참으로 맹렬한 것이었다(오스카 쿨만, 전경연 편,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5권, 7,8쪽 참조).
[공격들] ① “그 논문은 생명의 양식의 주림을 채우려고 죽도록 갈구하는 불란서 사람에게 비록 뱀은 아닐지라도 떡 대신 돌을 주었다.” ② 오스카 쿨만에게, 당신은 “영적 번민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괴물”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③ 어떤 사람은 그 논문에 대하여 “놀라움과 슬픔과 그리고 깊은 번민의 원인”이 되었다고 실토했다.
[쿨만의 반응] “어떤 비판자도 본문 주석으로 나를 반론하고자 시도하지 않았다.…나의 글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들이 주석학적인 논의에 근거되었더라면 이 공격들은 내게 더 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는 철학적인, 심리학적인,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막연한 이유로 공격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은 성경에 근거한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철학적 가설과 추측이 종교암흑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교리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영혼불멸설을 인정하고 믿게 될 경우, 사탄이 미혹하는 현대 강신술에 넘어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미 죽었던 자들이 나타나서 천국에 다녀온 이야기, 지옥에 다녀온 이야기, 혹은 성경의 교리를 왜곡시켜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온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하면서 정통적 기독교 성서관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인간의 가르침이나 사상, 혹은 교회의 전통보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안전하게 하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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