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3
2019/07/05 13:0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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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체코 보헤미야의 후스파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지만 끝내 살아 남아 보헤미야 형제교회 탄생

체코형제교회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존 위클리프
중세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개혁의 횃불을 밝힌 사람이 있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신학교수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가 그 사람이다.
그는 1370년 ‘교황에의 저항’이라는 책을 통해 “교황의 주장들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악한 것이며, 교황 자신의 구원도 일반 사람들의 구원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모든 기준은 복음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로 결정될 뿐, 결코 교황이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면죄부 판매, 순례행각 및 성직자 독신제, 교황 제도 등을 비성경적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이 책은 이단서적으로 규정되어 불태워지고, 그는 1384년 12월 29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교훈을 몸소 실천하려는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청빈한 설교자들’이라는 선교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을 ‘롤라드파’(Rollards)라고 한다. 롤라드파는 사도적 청빈을 생활 모토로 삼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지팡이 하나만 들고 둘씩 짝지어 전국을 돌며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와 비성경적교리를 비판했다. 그리하여 롤라드파는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체코 보헤미아의 얀 후스
영국에서 롤라드파에 대한 탄압조치가 한창인 14세기 후반기에 체코 보헤미야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의 물결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얀 후스(John Hus, 1371-1415)이다. (요한 후스, 쟌 후스, 존 후스가 모두 얀 후스를 언어권에 따라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
당시 위클리프가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과 후스의 모교인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383년 영국 왕 리차드 2세와 보헤미아 공주 안나와의 결혼으로 양국은 가까운 관계를 갖고, 보헤미아 청년들이 대거 옥스포드대학에 유학생 신분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들이 왕비 안나에게 기증되었고, 유학생들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보헤미아로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1380년대 초반기에는 벌써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위클리프주의를 프라하로 들여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que, 1371~1416)이다. 제롬은 후스의 제일 가는 친구요 제자이기도 했다. 후스는 영국에 유학한 일이 없으면서도 제롬을 위시한 보헤미아 유학생들을 통하여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같이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서만 구성되며,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은 신약성경이요, 교회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성경적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이같은 당연한 교회의 가르침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간주되었다.

프라하 베들레헴교회 설교자
후스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프라하 대학교에 다닐 때 노래를 부르고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하여 1393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년 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아, 1401년에 로마교회에서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프라하대학의 신학부장 겸 프라하 베들레험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어로 설교했다.
후스는 가톨릭교회의 성직 위계제도(성경의 집사, 장로, 감독 외에 추기경과 교황으로 이어지는 가톨릭 성직 제도)에 회의를 가졌다. 당시 체코 교회는 슬라브 민족주의와 보헤미아 민족주의 간의 갈등으로 교황청은 복잡한 문제들에 얽혀 있었다.
그로인해 프라하의 후스의 적수들은 그를 로마 교황청(1407년)에 고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미결상태로 심리되고 있는 동안 교황청은 분열이 생겨 후스에 대한 고발건을 다룰 수가 없었다. 그 사이 후스가 프라하대학의 초대총장이 되었고, 그의 주장이 보헤미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후스가 1409년 프라하대학 내에 있는 보헤미아파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개혁과 국민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대변하게 되자 가톨릭 교권주의자들은 후스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후스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후스파의 분열로 탄압 빌미 제공
이때 후스의 활동을 못마땅히 여겨온 프라하의 대주교 스빈코(Sbinko)는 자신들이 옹립한 피사계의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이용하여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에서 후스가 설교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불태우라는 교황령을 받아냈다. 후스를 침묵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리하여 1410년에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불태워졌고, 대주교는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가 파문 당하자 프라하에서는 대중들의 소동이 일어나 오히려 후스는 민족적 영웅이 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1410년 교황 알렉산더 5세가 갑자기 죽고, 그를 이어 요한 23세가 새로운 피사계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이 십자군을 소집하면서 기금을 모우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자 후스는 이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에 교황은 1412년에 후스를 파면하고 프라하에서 그를 추방했다. 그래도 대중은 후스를 지지했다.
그러자 후스파는 두 유파로 분열했다. 하나는 칼릭스파(Calixtines; 성배파)이고, 다른 하나는 타보르파(Taborites, 타보르 산에 거점을 둔 파)이다.
칼릭스파는 성찬 때 떡과 잔을 평신도에게 허용해야 한다는 양형성찬파로서 대체로 귀족적인 사람들의 모임이고, 타보르파는 노동자 농민 등을 대표하는 계층으로서 보다 과격한 집단이었다.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칼릭스파는 종교적인 문제에 불만이 큰 반면, 타보르파는 사회적 문제에 불만이 컸다. 타보르파는 화체설과 성인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면죄부, 고해성사, 맹세와 춤과 오락을 금지했다.
이 두 파는 끝내 서로 대립하다가 프라하에서 22,000명이 한꺼번에 학살 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1434년 5월 30일 ‘리판의 전투’라는 일대 접전을 벌여 많은 사람이 죽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보헤미아가 분열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후스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정죄 받아 화형 당해
이런 와중에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를 받아 콘스탄츠에서 1414년 11월 1일 공의회를 개최했다. 1918년까지 45차례의 회의를 가진 이 공의회는 교황청의 대분열을 수습하고, 공의회의 결정이 교황의 결정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인함으로써 중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 평가된다. 당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왕도 겸하고 있었다.
황제는 보헤미
아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후스를 공의회에 초청했다. 후스는 황제로부터 ‘안전통행권’을 약속받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1415년 5월 4일 회의 도중 영국의 위클리프를 정죄하여 그 시체를 파내 불사르도록 결정하고, 7월 6일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콘스탄츠 시 외곽에서 화형시켰다. 후스의 친구 프라하의 제롬도 얼마 후 히르샤우에서 체포되어 콘스탄츠로 압송돼 같은 장소에서 화형당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보헤미야 형제회
그러나 로마교회는 후스파 교회를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었다. 후스파에는 이 두 집단과 다른 집단도 있었다. 이를 우니타스 프라투룸(Unitas Fratrum0이라 한다. 대개 보헤미야 형제회(the Bohemian Brethren)라고 알려진 조직이 그것이다.
보헤미야 형제회는 후스가 죽고 40년 뒤인 15세기 중반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이미 보헤미야와 모라비아에 400여 개에 이르는 지교회에 20만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신앙고백고서와 요리문답 및 찬송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직접 예배를 인도하고, 가톨릭 사제들에게 성찬을 받지 않았다. 군복무와 전쟁을 배격했고, 연옥 교리를 반대했으며, 생활이 건실하지 못한 사제들의 성직 수행을 배격했다.
이들은 1722년에 모라비안 형제단의 진젠도르프 백작이 마련해준 헤론후트라는 지역에 정착하고,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도 아래 헤른후트를 거점으로 벌인 선교사업으로 루터파와 종교개혁 세력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또 그린란드로부터 서인도 제도와 기니, 티벳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힘썼다. 이들 대부분은 목공, 조리사, 정비공, 제빵업 등의 기술을 배운 평신도 선교사였다.
지금 체코에 있는 형제교회들은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된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루터보다 딱 100년이 앞서지만, 오늘날 그들의 교회도 프로테스탄트 후스파 교회라고 부른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이들의 진리에 대한 불굴의 정신을 이어 받은 데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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