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타 교파에 대한 이단 논쟁은 개혁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

1. 중세의 종교개혁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는 종교개혁은 사실상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과도한 종교적 억압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는 이단색출이라는 종교재판소의 무분별한 인권유린이 한몫하고 있다. 중세의 종교재판소는 이단으로 인정된 사람은 화형에 처하고, 그 재산은 몰수해 그 반(半)은 이단을 고발한 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은 종교재판소가 가졌다. 그러니 자기네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위해 억지로라도 이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단에 대한 고발은 철저한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누가 밀고자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재판에서는 증인이나 전문가에 대한 반대심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기록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아서 앞선 심리에 관한 정보 취득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고발인과 재판관이 동일인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른 독립 법정에의 항소는 불가능하거나 헛일이다. 재판의 목적은 밝혀져야 할 진실을 찾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언제나 진리와 동일시 되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굴복시키는 것에 있었다. 여기에는 가혹한 고문이 따랐다. 그러므로 한번 고발된 자는 절대 빠져 나갈 수 없었다.
대관절 이러한 종교재판이 나사렛 예수가 가르친 말씀 및 그의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 답은 “전혀 없다”이다. 그런데도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교회가 왜 그토록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잔혹한 고문을 통해서라도 이단을 만들고, 끝내 공개적으로 화형시키는 종교재판을 그렇게도 끈질기게 주도했는가. 그것은 오로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교회라는 집단의 거대한 교권을 지키려는 세속적 욕망에 있었다. 중세의 이단은 모두 로마교회의 도덕성의 개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왈도파와 알비파의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이단자들이었다. 중세 교회사는 페이지마다 왈도파와 알비파 같은 억울한 이단들이 흘린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교회사는 복음을 선포하는 기독교도 교권주의화 되면 그 교권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시비도 생명을 학살하지는 못하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 종교개혁세력에는 독일을 중심한 루터파와 스위스를 중심한 개혁파가 있다. 개혁파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칼빈의 장로교,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위그노, 화란의 개혁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등 다양한 세력이 있다. 후에 이들이 세계개혁교회터뮤니온(WCRC)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커뮤니온에 한국 장로교의 예장통합측이 회원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로마 가톨릭이 이단으로 몰아 학살한 왈도파와 알비파의 후예들이 정식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 외에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이단으로 박해받은 교회들이 있다.
(1) 위그노파((Huguenots)
프랑스 교회의 개혁파 '위그노'운동은 독일에서 일어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이 프랑스 안에 스며든데서 비롯되었다. 1518년 파리 근교 모(Meaux)의 주교인 기욤 브라소네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개혁사상을 가진 르페브르라는 사제를 부주교에 임명했다. 르페브르는 1521년부터 1525년까지 인문주의 동료들과 함께 '모 서클'이라 칭하는 개혁모임을 만든 사람이다. 거기에 요한 칼빈을 제네바 개혁에 동참시킨 기욤 파렐이 있었다. ‘모 서클’이 1524년 신약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자 파리 소르본느 신학대학은 이를 이단서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의회가 나서서 브라소네 주교를 루터파 이단으로 비판해 프랑스어 성경은 금지되고 브라소네 주교는 개혁에서 손을 떼고 '모 서클'은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루터의 저술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비밀리에 읽혔다. 이어서 쯔빙글리나 다른 개혁자들의 사상도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1523년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벌금에 처하거나 투옥하거나 화형시켰다. 그리고 1546년 모에 최초의 위그노 교회가 설립되었으나 그 해 당국의 검색을 받아 예배 중에 62명이 체포되고 그 중 14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그 해 10월 8일 공개적으로 화형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동안 파리의회는 500명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투옥하고 68명을 사형시켰다. 그로부터 끊임없이 박해가 시작되다가 1972년 8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날이 마침 성 바돌로매 축일이어서 ‘바돌로매 대학살’이라 부른다. 이 날 파리에서 희생된 위그노의 숫자만 1만2천여명으로 추산된다. 그 후 대학살은 여러 도시로 확산되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이 후 앙리 4세가 1598년 4월 ‘낭뜨 칙령’을 통해 위그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으나, 이 칙령도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의 ‘몽텐폴로 칙령’에 의해 취소되고,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수 많은 위그노들이 인근의 종교자유가 허용된 나라로 이민을 떠났다. 1560년대부터 1760년대까지 2백년동안 대략 20만명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개혁파 신앙을 보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2) 재세례파(Anabaptist)
중세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 취리히는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 중심지이다. 재세례파 운동에는 그곳 명문 출신으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과 펠릭스 만쯔(Felix Manz)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이 오랜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기에는 반쪽 개혁운동이라고 평가하고 더 철저한 성경적 개혁운동을 주창했다. 이들을 '스위스 형제단'이라 한다.
교회사에서 과격한 개혁운동으로 평가되는 그들의 개혁운동은 쯔빙글리가 성상(聖像)이나 미사를 폐지하는 일에 시의회를 앞장 세운데 비하여, 오히려 중대한 교회 문제에 시의회가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 아래 모인 그레벨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저한 교회개혁을 바랐다.
그레벨은 유력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비엔나와 파리 대학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인문주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을 착수한 쯔빙글리의 학문성을 발견하고 그 운동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함께 연구하고 성경의 원문을 다시 공부하면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쯔빙글리의 개혁파 운동과 그들이 생각하는 개혁운동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세례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톨릭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온 유아 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쯔빙글리도 초기에는 이같은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성인만을 위한 세례’를 주장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특권을 빼앗는 결과가 된다는 비판을 받아 종래의 주장을 철회했다. 이유는 유아 세례를 지지하는 보수주의 세력을 개혁파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취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레벨과 그 동료들은 유아 세례는 하등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세례란 자기 자신의 고백과 판단 아래 신앙의 상징으로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재생의 상징인 세례는 인격의 변화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신앙의 인격적 결단과 유리된 세례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유아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신자(信者)가 된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를 ‘재세례’(再洗禮)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신교 모두에게 적(賊)으로 간주되어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앞날에는 혹독한 수난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단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법에 의해 처벌되었다. 화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신교도들의 영역에서는 그들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그리하여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모두 순교했다.

2. 한국교회의 이단 논쟁
한국교회의 이단논쟁도 중세 종교재판소의 그것과 어쩌면 닮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이단을 많이 만들어온 예장통합측 이대위의 경우도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어떤 노회에서 헌의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고발인과 재판관이 동일인인 경우가 많으며, 증인이나 변호인의 반대심문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피고발자에게 자신의 변호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억을해도 항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통합측은 타교단 목사들에 대한 이단정죄는 멋대로 하면서 막상 그 판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심을 요청하면 자기네 “치리회 회원이 아니므로 원고 자격이 없다”며 모든 서류를 각하하기 때문이다. 아니 자기네 총회 치리회 회원이 아닌데 어째서 이단심판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참으로 희안한 논리에 빠져있다.
또 한국기독교는 이단연구라는 명분으로 남의 신앙을 재단함에 있어 그 목적이 사실과 진실을 찾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파 교단 총회의 교리와 신학을 진리와 동일시 해 누구이든 거기에 굴복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유아 세례를 반대해도 이단이 되고, 귀신을 쫓아내도 이단이 되고, 구원을 강조해도 이단이 된다.
그 집단에 교주우상주의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의 위배와 그리스도의 대속론을 부정하는 일이 없는 한, 어떤 기독교 단체이든 결코 이단은 아니다.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강춘오 목사/발행인>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특별기고/기독교 복음의 정통성과 교회의 다양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