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의 한 신도 처단 사건/임 영 천 목사
2019/12/23 13:3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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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정확히 1761년 10월 13일 프랑스의 남부 도시 툴루즈에서 있었던 일이다. 생업이 직물(織物) 상인이었던 장 칼라스라는 사람의 큰아들이 아버지의 직물가게 문틀에 목을 매어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사법당국에 신고하였다. 그의 죽음은 엄연한 자살이었고 그 때문에 당국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만 했더라면 모든 것은 조용히 끝나버리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사실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모든 게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방향으로 수사 결과가 발표되고 그 사건은 결국 재판으로까지 비화되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이 타살되었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는데, 수사당국이 범인으로 지목한 이는 엉뚱하게도 사자(死者)의 친부 칼라스였다.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한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고,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는지 그 이유 규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당국이 칼라스를 범인으로 지목해 발표한 내용이란 이러했다. 위그노(개신교도)인 부친 칼라스가 최근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작정한 큰아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극단적 응징을 한 결과가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났다는 요지였다. 당국은 이런 수사 결과를 가지고 칼라스를 재판에 회부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 칼라스는 친자 타살이란 엄청난 죄목을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정녕 하늘도 무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배경 설명이 다소 필요하리라.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영국, 프랑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 흘림이 없이 그 개혁의 목표가 달성된 나라는 없었다. 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에 동조한 일반 신도들 모두가 피를 흘림으로써(순교 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개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른바 ‘칼라스 사건’이 벌어진 나라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이 강세였던 프랑스에 장 칼뱅의 개혁사상이 유입되면서 소수의 신교도(위그노)들이 다수의 구교도들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572년에 발생한 ‘성(聖)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사건’이었다. 가톨릭 측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 수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성 바돌로매의 축일 행사에 위그노들이 모이도록 해 놓고 그들을 마치 가축 도살하듯 몰살시켜 버렸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그 결과는 10년 전(1562)부터 시작돼온 ‘위그노 전쟁’을 더욱 격화시킨 꼴이 되었다.  
이 무서운 사건 이후로 신·구 양측 교도들 간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감을 우려한 당시의 왕 앙리 4세가 1598년 위그노들의 신앙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양측의 긴장관계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위그노 전쟁’(1562-1598)이란 내전도 여기서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절대군주(태양왕) 루이14세에 의해 1685년 철폐되고 말았다. 80여년 동안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었던 위그노들은 다시 암흑적인 현실에 직면해야만 하였다. 왕은 위그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이주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박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그 ‘칼라스 사건’이 또 발생한 것이었다. 칼라스 사건은 말하자면 가톨릭 측 인사들이 계획적으로 위그노 신자인 칼라스 집안의 청년 자살 사건을 타살 사건으로 날조해 놓은 것이었다. 거기에 친가톨릭 성향의 사법부 인사들도 합세해 위그노 신도인 칼라스 일가를 법망으로 얽어 사멸시킨 참극이었다. 위그노 집안의 아들이란 신분으로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 큰아들이 자살을 택하고 만 사건을 완전히 침소봉대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해 버렸다는 식으로 덮어씌운 것이었다.
지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칼라스는 1762년 3월 9일 고법에서도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공개적인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사지가 찢겨진 채 불살라졌다. 잔인하고도 참혹한 처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무언가 조작된 데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재심을 청구했고,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또 칼라스의 원통함도 신원(伸寃)할 수 있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지 만3년 뒤인 1765년 3월 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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