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복협 1월 월례회 ‘사회통합과 기독교의 역할’②
2020/03/02 11:3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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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통합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로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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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복음주의월례회가 지난 1월 10일 종교교회에서 개최한 1월 월례회 중 박종화 박사가 발표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를 일부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
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
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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