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윗 / 암논의 강간 사건(삼하13장) ②
2020/03/02 12:06 입력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지 부재 현상은 사회적 병리(病理)를 낳는다
 
1.jpg
 이제 다윗은 많이 늙었다. 마음이 약해지고 감정적으로 너무 약해 있어서 아들의 잘못을 책망할 힘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윗이 아버지 역할을 못한 아버지 부재(不在)의 모습은 다말사건에서도 나타난다. 다말은 이복 오라버니 암논에게 강간 당하여 버림받았을 때, 그 슬픔과 좌절을 안고 아버지에게로 가서 어떤 하소연이나 아픔을 털어 놓지 않았다. 다말은 동복 오라버니 압살롬에게로 가서 위로를 받고 지낸다.
다말에게는 아버지 다윗보다 오라버니 압살롬이 더 가까웠고 친밀하였다. 자신의 수치와 슬픔, 마음의 상처를 내어놓을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고 오라버니였다. 이는 평소에 아버지 다윗이 자녀들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에서도 다윗의 아버지 부재 역할은 계속 반복된다. 그는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서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이키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가정은 저주가 임하고 가정의 몰락은 정치의 몰락을 가져오는 비극을 맞이한다.
아버지 부재(不在)는 어느 시대이든지 그 시대의 가장 파괴적인 흐름이다. 아버지 부재 현상으로 인해 끔찍한 사건들이 가정과 사회 안에서 발생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마약중독, 실업, 자살, 폭력, 정신병, 아동학대 등이 아버지 부재와 매우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죄의 뿌리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죄 문제는 곧 아버지의 문제다.
 인류의 죄는 첫 아담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근원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믿는 순간 전 인류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다.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된 아담은 스스로 고아가 되고 그의 자녀들도 고아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만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아버지와 단절된 아담에게 아버지의 생명이 공급되지 않기에 죽음이 오게 되었다. 아담은 아버지를 거부함으로 후세대에게 죄와 사망, 즉 ‘아버지 없음’ 이라는 유산을 물려줄 것 밖에 없었다. 아담이 자진해서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하여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고아가 되었다.

“구원은 마지막 아담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
구원은 한 남자, 즉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고아가 된 인류에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심으로 얻게 된 결과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고아가 된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그 가족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골 2:11~22).
말라기는 세례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언할 때 이런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않으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 4:6).
인류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줄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없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사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아담의 자손들은 그 어느 세대도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아버지 부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지상의 남자들이 책임 있는 아버지가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없는 인류에게 아버지가 되사 자신을 통하여 인도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성부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성숙해 가라 그러면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된다. 자녀는 아버지의 정체성을 이어받는다. 남자에게 아버지의 역할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남자가 아버지가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의 존재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를 창조하실 때부터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 그래서 모든 남자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될 잠재력이 심겨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남자 아이가 성장하면 아버지가 되도록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 아이가 소년의 모습을 벗고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인생의 진정한 만족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란 남자의 운명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하나님과 같은 아버지가 되라는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면 실패자이다. 호화로운 저택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명예와 권위가 있어도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없다. 한 남자의 성공여부는 그가 얼마나 경건한 아버지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남자다움’의 표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자는 어떤 존재인가, 곧 그리스도를 닮음(Christlikeness)이다. 그리스도를 닮음과 남자다움이란 단어는 동의어이다. 그리스도를 닮음과 여자다움(Womanhood)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면 그들은 아주 높게 끌어올려진다. 그들의 인격과 성품이 충만히 성숙된다. 모든 개인의 최고선(最高善)은 예수님 같아지는 것이다.
교회, 가정, 국가의 강성함은 남자의 강성함과 일치한다. 책임을 지고 이끌어가는 지도력은 남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모든 남자들이 남자답기를 위하신다. 가정에서의 모든 문제는 아버지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영적 미성숙 때문에 죄와 부도덕, 비윤리적 행실, 그리고 여자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을 뿐더러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지 또 어떤 양심의 기초를 가져야 할 지 판단하게 해 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다움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닮음이란, 요셉이 보디발 장군 부인의 유혹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까?(창 39:9)” 하면서 과감히 거절하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그의 인생의 잣대였다. 이것이 남자다움(Manliness)이다.
인생에는 생명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용기, 책임, 사랑, 진실, 품위,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이것이 남자다움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제일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가정의 머리이다. 지도자요 교사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사랑의 왕이요 대제사장이다. 그래서 변화의 시작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어야 가족들도 변화된다. 아버지는 변화의 기준이다. 가족들의 경건한 삶의 모델이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가정  
1703년에 태어난 조나단 에드워드는 가정을 경건하게 이끈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마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이었을 것이다. 목사이자 저술가이며 나중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을 지낸 그와 아내는 열한 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의 남자 후손들 가운데 알려진 바로는 다음과 같은 아들이 있다.  
•300명이 넘는 목사와 선교사, 신학 교수가 있었고, •120명은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했고, •110명은 변호사가 되었고, •60명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30명은 법관이 되었으며,•14명은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3명은 미국 상원 의원이 되었고, •1명은 미국의 부통령이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아들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각기 자신의 아들을 구했고, 이들은 또 자라나서 자기 아들을 구한 것이다. 대대로 소년들이 구출되었다.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죽은 뒤에도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후손에게 감화를 준 것이다.
에드워즈는 날마다 열세 시간씩 규칙적으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르침과 저술, 목회로 인해 바쁜 일정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집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에드워즈는 역사상 위대한 지성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계적인 학자는 일의 우선순위를 바로 알았다. 그는 단지 저녁 식사를 하러 집에 온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온 것이다. 에드워즈가 대대로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세대 간에 경건한 남자들이 계속해서 더욱 경건한 남자들을 낳는 고리가 있을까? 아니면 뚜렷한 역할 모델을 갖지 못한 남자들로부터 혼란스러운 리더십만이 대대로 이어질까? 그와 같은 미래 세대의 운명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 오늘 아버지가 내리는 선택이 앞으로 가계를 이을 세대들의 삶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을 구출한다면 이는 아버지 삶에서 가장 위대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pnnews@empas.com
교회연합신문(www.ecumenicalpress.co.kr) -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화제의 포토

화제의 포토더보기

  • 회사소개
  • 광고안내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회원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 교회연합신문 (http://www.ecumenicalpress.co.kr)  |  발행인 : 강춘오  |  설립일:1991년 11월 16일
    | 사업자:206-19-64905  | 03127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16길 73-10  |  대표전화 : 02-747-1490              
      Copyright ⓒ  교회연합신문 All right reserved.
    교회연합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