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의 부활절과 성탄절 논쟁 /강 춘 오 목사(발행인)
2020/04/10 18:1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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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때부터 부활절과 성탄절 동·서 교회가 각기 달라

325년 니케아공의회서 부활절 통일... 성탄절은 12월 25일 서방교회 주장 따라

 부활절 논쟁
 예 수님은 그 해 유대력 니산월 14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유월절 어린양(고전 5:7)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가 안식일이 지난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다. 이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날짜여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날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기독교는 이 ‘부활절 날짜’를 놓고 오랜 논쟁을 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대속의 죽으심을 중요시 할 것인가, 주의 부활일을 중요시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즉 부활절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주 중(7일) 어느 날이 되든지 유대력 니산월(첫달) 14일에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주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도 시대가 지나고 주후 2세기에 이르면 교부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교회는 세 가지 절기를 지켰다. 그것은 유월절(부활절)과 오순절 그리고 주현절이 그것이다. 기독교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파스카 스타로우시몬(Pascha Staurosimon, 본 유월절)이라 불렀고, 바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일을 부활절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슬픈 날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곧 이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 동시에 이어졌다. 그래서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은 니산월 14일에, 유대교 유월절에 맞추어져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15일 해뜰 때까지 유대교의 유월절양 대신, 성찬과 애찬으로써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인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 그래서 이들은 ‘14일파’라고 불렸다.
소 아시아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 교회는 기독교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의 날’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님이 죽으신 니산월 14일에 맞추다보면, 그 날이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니산월 14일에 맞추는 수난 기념일은 기독교의 부활정신과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어 동방교회(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와 서방교회(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 간에 부활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313년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합법적 종교’로 공인되자,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세계기독교공의회가 모였는데, 그 회의에서 조정된 것이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한다”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성경적 부활절을 주장한 ‘14일파’는 오히려 이단으로 몰려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그 때는 기독교가 지중해를 끼고 로마령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당시 세계교회가 통일했다. 그 전통을 오늘날의 세계교회가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그 런데 이 부활절 논쟁은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에 관한 문제도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 초대 교회에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2세기에 이르러서는 차츰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아의 결정은 기독교 교회력의 독창성과 그리고 유대교로부터 독립된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는데 있었다. 초기 기독교가 부활절을 ‘12월 25일 성탄절’과 같이, 어느 한 날자를 정하지 못한 것은 주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성탄절 논쟁
예 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한 최초의 인물은 서방교부 히폴리투스(Hippolytus, 180년경)로 알려져 있다. 히폴리투스는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로부터 십자가 형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는 정확히 33년이며, 이 두 사건은 모두 3월 25일에 일어났다고 계산했다. 그래서 수태고지로부터 만 9개월이 되는 12월 25일에 예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155-220년경)에 의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4월 18일 또는 19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클레멘스는 19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요리문답학교 교장을 지낸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다. 그리고 또 3월 28일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한 기록이 없다.
동 방교회는 4세기 초엽에 1월 6일을 예수의 육채적인 생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영적인 출생일로 지켰다. 예루살렘교회는 4세기 중엽에 예수의 출생(出生)과 수세(受洗)를 동일한 1월 6일에 기념했는데, 탄생은 베들레험에서, 수세는 요단강에서 기념했다. 베들레험에서 요단강까지는 약 30km나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를 하루에 기념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예루살렘교회의 주교 키릴루스(Cyrilius)가 로마의 주교 율리우스(Julius)에게 그리스도의 실제 출생일자를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다. 율리우스는  제사장 사가랴가 장막절에 환상을 보았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했다(눅 1:26)는 말씀을 연결해 12월 25일을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다.  
또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이 된 것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12월 17-24일)와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제(冬至祭) 브루말리아(Brumalia, 25일) 축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농신제와 동지제는 민간에 너무 깊은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 축제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 동방교회 설교자들은 서방교회가 이교의 태양신 숭배 문화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25일의 축제는 서방교회가 주도하는 가톨릭 체제에 급속도로 수용되었고, 결국 16세기 종교개혁도 그 절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았다.
이 런 이유를 내세워 환원주의자들은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가 기념해 온 12월 25일 성탄절을 기독교가 마치 이교(異敎)의 태양신 숭배사상을 받아들인 것인양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더우기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신이 깊은 어떤 교회들은 아예 성탄절 자체를 기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태양 위에 빛나는 '의로운 태양'(말 4:2)이다. 따라서 반드시 그 날짜가 확실한 것은 않을지라도 교회가 한 날을 정하여 그의 출생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온 인류가 함께 축하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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