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3
2020/04/24 17:0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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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이신 예수님 (마태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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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주일이 맞는 것인지, 안식일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교회의 주일 예배가 중지되고 있어서 특별히 주일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께서 기뻐 받으시는 주일 예배인지 배우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2:1-14이다.
본문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전통적인 안식일의 규정을 무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비를 불러일으켜,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모의를 하게 되는 사건이다. 1-8절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꺾어먹은 사건이고, 9-14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고소하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논쟁이었으나,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부르는 사건으로 비화하였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식일이 왜 있는 것인가?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 활동을 마치시고 쉬셨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쉬셨을리는 없다. 히브리어 성경, 창세기 2:2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안식일”(Sabbath)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그가 하셨던 그의 일을 마치셨다[]. 일곱째 날에 그가 하신 모든 일을 그치셨다 [“샤바트”): 중지하다, ceased]라고 기술하고 있다. “쉬다”는 개념의 “안식일”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에 사용하신 말이다. 여기서 “샤바트”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쳤다,” “그쳤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 보면 이는 완성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감이 내포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 “거룩하다”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라는 말은 “성별하다” “바치다”(consecrate)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일곱째 날은 복되고 거룩한 날, 곧 하나님의 날이다.
둘째로 안식일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을 위한 날이다. 사람은 일만하고 살 수는 없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쉼이 필요한 존재아다. 사람은 일의 노예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점에 있어서 동역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따라서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일을 그치시면, 사람도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노동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개념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구체화 된다.
사람이 제7일에 일을 멈추고 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다. 십계명 중 제 4명에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7일에 쉰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라는 징표 (the sign of covenant)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할례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의 언약의 표였던 것과 같이 제7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여호와와 맺은 언약이요, 언약의 표었다. 따라서 제7일에 일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범죄였다. 여호와께서는 제7일에 일하는 자는 언약을 범하는 자는 법대로 죽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는 훈련을 광야에서 40년이나 시키셨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훈련이 필요했다. 먹는 훈련, 안 먹는 훈련, 쉬는 훈련, 일하는 훈련, 여호와의 언약백성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안식일은 바로 쉬면서 안약백성으로서 도를 훈련받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제 7일을 거룩하게 구별집행을 기다리며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다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새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세상 만물을 살리신 날이다. 그리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 언약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날, 곧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뻐하고, 기념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므로 바로 이 날이 새하늘과 새땅이 처음 열린 날이고, 새로운 세계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고, 나의 인생도 새롭게 시작된 날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되었다. 그래서 주간 첫 날이야 말로 예수님의 날, 주님의 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다”이라고 선포하셨다. 한글 성경은 “주인”이라고 번역을 해놓으니까 “집 주인” “가방 주인” “자동차 주인”처럼 좀 왜소한 느낌이 든다. 헬라어 “큐리오스”라는 말은 “The Lord,” 곧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주일”이라는 말을 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제7일을 안식일로 칭하시지만 제7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율법은 아담과 함께 땅에 묻혔다. 더 이상 우리에게 안식일은 없다. 구약성경만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새창조의 날, 모든 역사의 새로운 시작의 날, 주간 첫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와 찬송의 예배를 드리며, 새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축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제7일에 땅 속에 묻혀있는 예수께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언약의 생명 축제를 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에 생겼던 사건을 살펴볼 차례이다. 본문의 두 사건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길가다가 배가 고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익어가는 밀 이삭을 꺾어 먹기 시작했다. 땀 흘려 농사지은 이삭을 잘라먹은 이들을 우리 눈으로볼 때는 분명 도적놈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여기서 문제 삼은 것은 이들이 남의 밀 이삭을 꺾어 먹은 것이 아니라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3:24-25; 24:19-22에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을 위하여 바구니나 낫을들고 밭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를 허락하였다.
문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해야 할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윗이 한 일을 상기시키신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하나님의 잡에 들어가 율법대로 오로지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 진설병이란 레 24:7절에 “여호와의 화제를 위한 기념 제물의 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화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이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을 모두 화제라고 한다. 속죄를 위한 제사는 짐승을 불로 태웠다. 그래서 화제는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을 상징하는 제사이다. 화제는 성소 밖 뜰의 제단에 양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이기 때문에 성소 안에서 드릴 수는 없다. 따라서 진설병의 역할은 성소 밖 뜰에서 드리는 화제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이 거룩한 빵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최후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떡은 특별히 구별된 것이어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 빵을 먹었다(삼상 21:1-5). 그들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것 같다. 제사장 아비멜렉은 이들에게 거룩한 빵을 내 주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나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는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분이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불쌍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살아야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이 갑질하는 자들에게 “내가 안식일의 주, 곧 하나님이다”고 선언하신다.
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사건이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졸개들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이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것을 붙잡아 끌어 올리지 않겠느냐?고 되물으신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안식일에 일하지 마라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죽게 내버려두고 안식일이 지나도록 기다릴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럴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전제로 계속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안식일 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다. 양을 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법보다 중요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안식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안식일이란 아무 일 안하고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 기본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빚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토브”()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good”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goodness”라는 말이 바로 “선”이란 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그 의미가 선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선한 것이다.  반대로 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방해하고, 거역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이 선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향하여 “네 손을 펴라”하시니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다(13). 온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사단이 망쳐놓은 일을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고, 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선한 일이다.
살리는 일에 골든 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 죽어버린 뒤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죽은 생명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살리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성전도 중요하고 율법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죽은 자들을 살리려 오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아무리 성전이 크다고 할 망정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보다 더 클 수 없다. 아무리 성전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중요해도, 성전은 예수님의 모형에. 불과하다(요 2:18-22). 그래서 예수님의 사람들은 이제 돌로 만든 성전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성전을 없애버리셨다. 돌로 만든 성전이 재건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만든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대신 예수님을 우리의 성전으로 주셨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고전 3:16-1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주일에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예배에는 말씀, 기도, 찬송, 교제, 그리고 전도가 있어야 한다(행 2:42). 함께 모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격파하셨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나라를 세우셨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로운 백성 삼으셨다.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으셨다. 우리 예수님의 백성들에게는 제7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창조의 날, 곧 새 역사의 시작의 날이 중요하다. 부활절 전 안식일에 예수님은 땅속에 계셨다.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새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부활절 날이 중요한 것이고, 부활절하신 첫째 날, 곧 안식후 첫째 날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해야 할 주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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