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천 목사의 토요시평] 항우와 유방, 그리고 후흑학의 문제
2020/08/31 10: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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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천 목사(조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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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의 여파로 방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의 적적함을 벗어나고자 필자는 부득불 문학작품 읽는 일에 빠지게 되었다. 지난날 읽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자꾸 미루기만 했던 작품들을 이번 기회에 읽어내는 것도 괜찮은 수확이겠다 싶어서 그 미뤄두었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럴 때 손에 잡히는 책들은 단권(單券)짜리 단행본보다는 아무래도 여러 권() 형식의 대하소설 같은 게 취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껏 읽기에서 미뤄져 왔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딘 속도로 다섯 권짜리, 또는 세 권짜리 장편 역사소설류들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 네댓 가지 국내외의 것들 가운데서 필자가 특히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작품이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항우와 유방>이란 것이었는데, 이는 원래 <초한지>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여러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느끼게 되는 첫 번째 감정이 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뛰어난 용장인 항우(項羽)가 별 볼일 없는 용렬한 장수 유방(劉邦)에게 최후 참패를 당하게 되었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서자 거개가 일으키는 반응이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항우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고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오강포(烏江浦)에까지 도달해 그가 최후로 탄식하는 말을 발한 뒤 자결을 하는 장면에 이르러 가슴이 쓰렸다고 해야 할까, 공허감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정상적이지 않은 미묘한 감정에 스스로 빠져버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항우에 대한 독자로서의 미련이 계속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의미이다.

 

나는 항우가 마지막으로 자결을 감행할 때, 적장인 유방 앞에서가 아닌, 단지 현상금을 욕심내어 뒤쫓아 온 이름도 없는 졸개들 앞에서 그가 자결을 감행해야만 했던 처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적장 유방 앞에서라도 떳떳하게 마지막까지 자웅을 결하다가 역불급(力不及)으로 전사하기라도 했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독자로서도 덜 분하다는 감정이 일어날 법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사체(死體)가 욕심(재물욕과 출세욕)으로 가득 찬 적진의 졸개들에게 찢겨져 하나의 현상(懸賞) 전리품으로 다섯 동강으로 나눠진 식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독자로서의 마음이 절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점과 관련해 그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들 가운데 아래와 같은 뜻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음을 보면 그 안타까운 심정을 알만도 하다. 항우는 오강포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반대편 강안(江岸), 곧 고향 가까운 강남땅으로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배가 그 단 한 척밖에 없었으므로 뒤쫓아 온 적병들이 항우를 따라잡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가 강을 건너간 뒤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국의 천하통일이 유방에 의해서가 아닌 항우에 의해서 이루어졌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배의 주인인 오강(烏江)의 정장(亭長)도 항우에게 빨리 이 배를 타고 도강하면 추적자들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며, 건너편 추종자들은 당연히 많아질 것이라고 재촉했지만 항우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이렇게 응수하였다. “설령 강남의 어른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다시 왕으로 추대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겠소? 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일이겠소?” 곧 면목 없는 일, 부끄러운 일,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항우는 나이 비록 어렸지만 지금껏 그런 기백으로 살아온 청년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목숨 부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항우는 대하역사소설의 인물군(人物群) 가운데서 장렬한 비극미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뛰어난 인물로 보인다.

 

요즘 출세주의가 판을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쳐서 이기고 보자, 또는 어떤 식으로든 최후 승자가 되고 보자는 식의 처세술이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말기의 리쭝우(李宗吾)가 제창한 마키아벨리식 후흑학(厚黑學)의 영향도 적잖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후안(厚顔)과 흑심(黑心)을 숨긴 채 어떻게든 상대를 꺾어야 한다는 배포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의 처세술이다. 뻔뻔함[厚顔]과 음흉함[黑心]을 무기로 내세우는 이 처세술이 정계, 재계, 문화계, 종교계어느 분야에서든 만연할 때, 이 나라의 질서는 혼란해질 것이며 나라의 앞날도 총체적으로 위태로워질 게 아닐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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