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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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1~2).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집이라고 부릅니다. 임금이 사는 곳을 전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궁정은 임금이 사는 궁전의 뜰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사모한다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건물로서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성막 지을 설계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은사 받은 사람을 만나 성막을 짓게 됩니다. 이러한 성막은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까지 장막으로 이어오다가, 솔로몬 왕 때에야 비로소 고정된 건물의 형태를 띤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연합체, 곧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 오늘날 성전은 회당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회당으로서의 교회가 지니는 대표적인 특징은 예배와 교제와 모임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임의 의미가 중요한 것은 성령이 교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이러한 말씀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하고 계십니다(2:11,17,29 3:5,13,22). 이처럼 오늘날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는 대부분 회중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오순절날 성령도 회중 가운데 임하셨습니다(2:1이하). 또 경건하여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던 이방인 고넬료에게 천사가 직접 구원의 도리를 말하지 아니하고 베드로를 청하여 듣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서 예수님을 전하였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사람 모두에게 임하였습니다(10:44). 1907년 평양 대부흥도 역시 회중 가운데서 시작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우찌무라 간조의 지도를 받아 이 땅에도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 유달영 등 무교회주의 자들이 여러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무교회주의 자들은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주창했던 많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회당교회 인정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성서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두 번째 성전은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13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을 시작하실 때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유월절 전에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싶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런 일을 무슨 자격으로 하는지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1~22). 이처럼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듯이 예수님은 성전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시고 계십니다(5:6).

 

성전의 세 번째는 신자들 자신입니다(고전3:16~17, 6:19~20). 신앙인들은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을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누구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있다면 모두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각자가 성전 된 의의는 구약시대 레위 지파 가운데 뽑힌 제사장을 통하여 제사를 드리고, 중보기도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신자들 각자가 어디에서든지 아버지께 직접 아뢸 수 있다는 점입니다(4:21).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이 재현되고 그로 인하여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직접 예배하고 직접 기도드릴 수 있으니 교회가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4:17).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디모데를 보냈는데 디모데가 바울이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바를 모를 때 주님을 바라보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가르쳐 주시는 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이며 그 성경에 있는 말씀도 대부분 성령이 교회 사자들을 통하여 해석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각 교회들이 제대로 모여 예배드릴 수 없는 점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하나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성령과 교회를 통한 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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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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