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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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합동측(총회장 소강석 목사)은 지난 416일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 연구 발표 세미나를 열고, 박형룡 박사, 정규오 목사, 명신홍 박사, 박윤선 박사, 이환수 목사, 이대영 목사, 박찬목 목사, 이영수 목사, 백남조 장로, 박종삼 목사, 차남진 박사를 포함해, 51인 신앙동지회, 실업인 신앙동지회, 승동교회 등의 공적을 연구 발표했다.

 

다음은 세미나에서 나온 각 인물들의 공적을 요약한 내용이다.

 

박형룡 박사, 개혁주의 신학 선도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변증학자이자, 조선신학자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한인 목회자들을 길러 교단의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 했다. 11948년에는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본 학교는 오늘날 총신대의 모태가 된다.

매년 총회 강도사 고시의 조직신학 문제의 표준 자료는 여전히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전집이 사용되며, 그의 교의신학 전집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신학 선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정규오 목사, 자유주의 신학 퇴치 앞장선 인물

정규오 목사는 교단 내 자유주의 신학을 퇴치하는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WCC 가입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표준 새 번역 성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 성경을 번역 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정부의 단군 신전 건립 반대에도 적극 가담했다.

교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군목제도가 정착하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총회 내 십일조 제도를 통해 재정난을 해결했으며, 합동-개혁 재통합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외에도 장로회신학교(총신대 전신) 설립에 공헌했으며, 광신대를 설립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기독교 인재를 양성했고, 구역공과를 최초로 발행 보급했다.

 

명신홍 박사, 총신대 본관 건립··· 재평가 시급

명신홍 박사는 한국교회 초기 신학의 거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다. 허나 명신홍 박사는 개혁주의 윤리 분야에 탁월했으며, 혼란스러운 신학 노선과 교단 분열이라는 암울한 시대의 와중에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투사의 기개를 가지고 한국교회를 위해 싸웠다. 또한 총회장으로 초회를 잘 지도했고, 총회신학교 교수, 교장으로 총신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총신대 본관 건립을 위해 살신성인 모금운동을 벌인 일이다. 그는 사당동 총회신학교 본관 건축을 위해 대장암 수술을 수차례 받고, 인공항문을 찬 채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개혁파교회(C,R,C)를 찾아가 천신만고 끝에 3만불을 모금해 오늘의 사당동 총신대를 건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현재 명 박사의 헌신으로 건립됐던 총신대 본관은 종합관이 들어서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박윤선 박사,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주경신학 완성

박윤선 박사는 박형룡 박사와 더불어 총신의 두 기둥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교의신학을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완성했고, 박윤선 박사는 주경신학을 동일한 관점에서 완성했다. 박윤선 박사는 평양신학교, 봉천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 합동신학교에서 재짐함으로 한국장로교회에 신학교 발전과 신학의 정초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환수 목사, WCC 배격 교단 수호

이환수 목사는 한국 보수신학의 이정표이자, 보수신학의 산실인 청암교회를 설립했다. 교회 안의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한국여자신학교를 설립, 운영키도 했으며, 교단 제44회 총회에서 WCC를 배격하고, 교단을 수호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47회 총회 총회장으로 섬기면서, 고신 합동, 고신 환원 등 어려운 시기에 정통 보수신학에 입각해 교단을 지켜냈다 1962년 총회에서 총회50주년 공로 표창을, 1973년에는 경기노회 100회 기념 공로 표창을 받았다.

 

이대영 목사, 승동교회 시무하며 보수신학 수호

1921년 조선 최초로 경북 안동의 안동교회에서 조직된 기독 청년면려회에 동참했다. 경안노회 최초의 파송선교사로 중국 산동성에서 26년간 활동하며 산동성 지역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정통보수신앙에 근거한 사역을 감당하며, WCC를 배격하고 보수 전통신앙을 고수했다. 특히 19591124일 제44회 속회 총회를 자신이 시무하던 승동교회에서 개최해 교단의 단결과 화합을 꾀했으며, 통합측과 결별 1년 후 같은 장소에서 고신측과 합동총회로 모여 새로운 부흥의 출발점을 마련해줬다.

또한 1959년 분열 이후 경기 예천에 소재한 금곡교회가 통합측으로 가지 않고, 본 교단의보수신앙을 지키고 따르는데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김윤찬 목사, ‘5인의 신앙 비밀결사결성해 신사참배 거부

김윤찬 목사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에 반대한 한부선 선교사 및 박형룡, 주기철, 최봉석, 이기선 목사의 편에 서서 5인의 신앙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남북 전쟁 시기에는 북한 기독교 연맹 거부로 목사 면직을 당하기도 했다.

남한에 첫 피난민 교회인 평양교회를 설립했고, 평양노회를 조직해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평양노회를 총회에 가입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칼빈신학교(현 칼빈대학교)의 설립에도 크게 공헌했고, 통합측과 분열 후 용산에 교단 신학교 건물을 마련하는데 역할을 담당했다. 49, 52회 두 번의 총회장을 역임했다.

 

박찬목 목사, 정통신앙 사수하다 옥고 치러

박찬목 목사는 일제 강점기와 공산 치하에서 민족운동과 정통신앙 사수로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피난 후 호남지역 정통신앙 파수를 위해 적극 활동했으며, 1953년부터 총회 임원이 되어 1966년 총회장까지 11회기를 교단을 위해 봉사했다. 특히 제44회 교단 분열과정에서 총회를 지키기 위해 수고했다.

 

이영수 목사, 교단의 기틀을 닦은 인물

이영수 목사의 대표적 공적은 일만교회 운동, 총신대 건축 및 양지 캠퍼스 설립, 총회회관 건립, 세계선교 훈련원, 평신도 훈련원 개원 등이다. 통합측과의 분열 이후, 시설과 재정 등에서 크게 열악했던 교단의 기초를 새롭게 다진 인물로, 이영수 목사는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다, 합동측이 한국교회 최대교단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백남조 장로, 헌신과 나눔의 본을 보인 인물

백남조 장로는 아낌없는 나눔과 헌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1965년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 18천평을 헌납한데 이어, 총신신학교가 대학 인가를 받을 수 있게 재정을 헌신했다. 여기에 총신대 재단이사장으로 21년간 헌신했으며,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발간에도 재정을 헌신했고, 총회에서는 46, 47, 48회기 동안 부회계로 봉사했다. 이후 통합측과 분열 과정에서 고향인 성주군 지역교회들을 설득해 교단에 남게 했으며, 전국실업인장로신앙동지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 외에도 부전교회, 남도교회, 전포교회, 가야제일교회, 부곡교회, 팔송정교회, 죽전성산교회 등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박종삼 목사. ‘51인 신앙동지회대표로 활동

박 목사는 조선신학교에서 자유주의 문제를 거론키 위해 ‘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한 인물로, 33회 총회에 51인 신앙동지회 10인 대표로 진정서를 제출했었다. 광신대의 전신이었던 광주신학교 제3대 교장과 제3대 이사장으로 학교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고,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목으로 재직하며, 기독교 후학양성에도 힘썼다.

 

차남진 박사, 고재봉 등 사형수 전도

차남진 박사 역시 51인 신앙동지회의 일원으로, 정통 신학을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총무로 사역했고, 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중했다. 교정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고재봉 등 사형수들을 전도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지난 2015년에는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51인 신앙동지회,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에 자유주의 신학이 퍼져나갈 때, 정규오 등이 51인의 학생을 규합해, 정통신학 수호에 나섰다. 이들은 남한에 잠자고 있던 보수세력을 각성시켰고, 그 결과 194863일 서울 남산에 9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51인 진정사건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적 신학교육이 조선신학교의 영역을 넘어 전국적 이슈가 됐고, 서양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실업인 신앙동지회, 교단의 새로운 정초를 담당

실업인 신앙동지회는 백남조, 김인득, 곽현보, 양재열, 권운형, 방남준, 김추호, 정규만, 박기동, 김정국, 장기동, 박찬수, 박기수 등으로 구성된 교단 내 장로 모임으로, 교단의 발전 초석을 마련한 헌신 단체다. 이들은 1962년 백남조 장로의 총신 사당동 부지를 매입 헌납했고, 본관 건축에도 크게 헌금했다. 여기에 총신 사당동 기숙사 건축을 이끌었고, 기독신문 창간에도 산파역할을 담당했다.

 

승동교회, 교단의 굴곡을 함께한 역사적 산실

승동교회는 그야말로 교단의 숱한 굴곡을 함께한 역사적 산실이다.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폐쇄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경기교구가 승동교회에서 회집되었으며, 19466, 조선예수교장로회의 복구 역시 승동교회에서 이뤄졌다.

1959WCC 문제를 놓고 내부 갈등을 빚다가 중단된 제44회 총회가 속회된 곳 역시 승동교회였으며, 이듬해 고신측과 합동 역시 승동교회에서 회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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