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임영천 목사.jpg

 

언젠가 나는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읽을 그때는 매우 감동 깊게 읽은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회고해 보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다소 안타깝다. 아마도 읽은 지가 꽤 오래되어서 그러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다음 부분만은 너무도 뚜렷이 나의 기억에 남아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하면 우선적으로 그 장면부터 떠오르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데가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 히포의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이전, 그러니까 그가 밀라노 시에서 수사학 교사로 일하던 시절 갑자기 강력한 회심의 체험(386)을 하고 나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직후 그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잠시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려고 여행길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 도중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신병이 악화돼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글픈 일이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통해 아주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모니카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들이 그녀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해 장사지내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은 어디나 다 같은 처소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니카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별게 아니라는 듯, 자신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심정으로 맞겠다는 식으로, 무서우리만큼 확고한 그녀의 신앙심을 드러냄으로써 또한 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모니카의 이 확고부동한 신앙심은 당시의 그녀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필부필부들에게도 같은 비중의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죽음을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심정으로 맞겠다는 결연한 자세, 아니 확고부동한 신앙심이 필요한 그런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때 나는 다른 계기로 고() 김성한 작가의 단편 역사소설 <바비도>를 다시 읽게 되었다. <바비도>15세기 초엽의 영국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의 영국 왕이 헨리4세였다. 그는 1399년 사촌형인 상왕 리처드2세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악명 높은 자였다. 그는 왕좌에 오른 2년 뒤 이단 분형령’(1401)을 통과시켰다. 이는 기독교의 이단자들을 골라내 불에 태워 죽이라는 법령이었다. 1407년 이후엔 개혁자 위클리프의 영역성서 비밀 독회(讀會)를 법으로 막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비도는 1410년 이런 조치에 의해 이단 분형령에 따른 화형을 당하게 된, 재봉직공 신분의 기독 청년이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상식 밖의 일들을 다 저지르면서도 평신도에게만은 각종의 규제들로 그들의 목을 조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강압적 규제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법이 만들어졌든 말든 오직 자기의 신앙 노선만을 굳게 지키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법 때문에 제 신앙노선을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 결과 그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종교재판정에서 사교가 심문을 시작했다. “밤이면 몰래 영역복음서를 읽었다지? 무슨 마귀의 장난으로 영어복음서를 읽구 듣구 했지?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느냐?” 무슨 심문에도 바비도는 사교의 뜻과는 반하는 말만 해댔다.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한 사교는 그에게 분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는 스미스필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헨리 태자가 나타나 그를 달래 보았다. “바비도, 누가 옳고 그른 것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하여간 네 목숨이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그럼 마음을 돌렸느냐?” 바비도가 대답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내 스스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나는 길이니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바비도는 불길 속에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다.

 

죽음에 임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심사로 떠난다고 하는 표현을 한 데서 바비도의 초연(超然)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은 임종의 모니카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심정으로 죽음을 맞겠다고 한 것과 같은 결연(決然)함이라고 하겠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우리는 지금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초연함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초연함, 결연함이 아무렇게나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바비도나 모니카에게서와 같은 확고한 신앙 위에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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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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