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여론이 등돌린 교회, 여론을 등에 업은 방역

코로나 초 선제적 대처못한 교회, 스스로 위기 자초

위드 코로나 대비한 전략 수립 시급··· 신뢰회복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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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사회적거리두기 4단계 조치가 장기화되며, 국민들의 불편이 점차 가중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소상공인의 호소는 어느 순간 분노가 된지 오래고, 직장을 잃고 주저앉은 가장의 손에 쥐어진 정부의 재난지원금은 오히려 삶의 허탈감만 더할 뿐이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교회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예배가 셧다운 되는 아픔을 겪었고, 그 틈에 등장한 비대면 예배는 여전히 그 정당성을 두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유독 교회만 대놓고 차별하는 듯한 정부의 불공정한 방역기준은 정부에 대한 교회의 반감을 폭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정부와 교회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교회 내부의 갈등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며, 여전히 내부 총질에 열을 올리고 있다. 총을 손에 쥔 자는 스스로 시대의 심판자를 자처하며, 철저한 자기기준으로 배교자를 규정하고, 군중으로 하여금 그에게 돌을 던지게 선동했다.

 

이 뿐 아니라 거듭되는 위기를 틈타 애국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정치의 지저분한 부산물을 교회 안에 들여 놓았고, 이를 매개로 폭발시킨 정치적 이념 충돌은 교회 본연의 정체성을 지워 버렸다. 오직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는 철저한 이분법과 전체주의적 의식이 이성을 지배하며, 애초 교회가 추구했던 합리적인 사고는 총질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선제적 대처자율방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는데···

합리적 사고를 잃어버린 교회가 코로나 사태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추락한 위상, 국민들의 잃어버린 신뢰, 목회자들의 도덕성 타락, 교계 분열 등코로나 이전부터 최악 그 자체였던 현실은 간과한 채 여전히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의 리더라는 과거의 영광만을 답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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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특히 교계 일부 인사들의 입버릇 같은 한국교회가 정부에 굴복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묵과한 왜곡적 사고의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가 발발한 지난해 초로 돌아가 보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기미를 보이던 당시, 한국교회는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이전의 메르스나 신종플루, 사스와 확실히 다른 전파 속도를 보이고, 신천지에서 대규모 확산이 사회 전체에 물의를 일으켰지만, 교계 연합단체와 주요 교단들은 그저 남의 일인 양 관망하기 바빴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 소강석 목사를 포함해 몇몇 지도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며, 교회의 선제적 대처를 주장했었다. 교회가 스스로 방역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적용함으로 국가와 국민이 인정하는 안전한 예배환경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코로나 사태 초기, 이러한 선제적 대처에 대한 조언이 무시됐다는 점은 현 상황에 너무도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만약 당시 한국교회 스스로 방역, 의료, 차단 등 다방면에 걸쳐 자체적인 방역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부의 예배 간섭, 통제는 결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코로나 사태에서 정부의 방역 기준에 교회가 포함된 것은 애초 자율 방역의 기회를 놓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정부에 분노하는 교회, 그런 교회에 분노하는 국민

신뢰 회복, 예배 회복 동시 이룰 고도의 전략 필요

반대로 이러한 배경은 정부와 교회의 협상 테이블을 기울어진 운동장에 고정시켜 놓았다. 교회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완전히 등을 돌려 버린 상황은, 사실 교회로 하여금 쉽사리 어떤 것도 선택치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교회에 대한 부당한 탄압조차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상황에, 그나마 일정 수라도 대면 예배를 유지했던 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서 이뤄낸 최선의 결과였다.

 

물론 비대면 예배를 결코 제대로 된 예배라 말할 수 없다. 비대면 예배는 어디까지나 임시적 조치일 뿐이다. 허나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가 임시적 방편까지 써가며, 비대면 예배를 해야 했던 이유 역시 명확했다. 만약 교회가 정부의 제재만을 생각했다면, 정부의 방역에 정면으로 맞섰겠지만, 교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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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바닥에 추락했고,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언론들은 교회를 겨냥한 비판 기사를 쏟아내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사실 코로나 사태에 있어 예배 회복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회복이었고, 이미지 재고였다.

 

코로나 사태에서 정부의 교회 탄압은 지극히 노골적이었고, 불공정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분노 역시 당연했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분노는 자칫 이런 상황에 이기적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무너진 국민들의 신뢰가 교회를 향한 분노로 뒤바뀔 수도 있다.

 

악법도 법이다는 매우 모순적인 명언이 한국교회에 필요했던 것은 사회와 국민 전체를 위해 부당한 탄압조차 스스로 감내하는 희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그 어느 집단보다 방역에 앞장서고, 안으로는 하루 7~8번의 예배를 드리며, 탄압 속에서도 대면예배를 지키려는 노력은 국민들의 등돌린 여론을 조금이나마 환기시키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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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적 관계가 경쟁으로 치닫는 요즘의 시대는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전략은 필수적이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더 이상 지붕 위에 십자가만 달아도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던 그 시절(?)은 지나갔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드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할 동시다발적인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당연히 내부 총질은 자제해야 한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끝없이 얽힌 요즘 시대에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내부 총질을 자행하는 것은 자멸을 재촉할 뿐이다. 코로나가 정점에 치닫은 현재 시대는 다시 한 번의 선택을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교회 역시 살아남을 전략을 고민해야 함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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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국교회가 정부에 굴복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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