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약산 홍치모 박사(1932-2013)
2021/10/17 16: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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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서울교회사 연구소장/ 대신대 전 한국교회사 교수)

장로교 역사학자로서 '종교개혁사' 서술

'한국교회사학회' 창립멤버로 참여 활동... 일반사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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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후 서울서 학교 다녀

약산 홍치모(樂山 洪致模) 박사는 193215일 평양에서 2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조선은 이미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부친은 그에게 역사 이야기를 자주해 주었다. 그는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에서부터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까지 역사상의 신앙인들과 의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약산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속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홍치모는 평양 성남소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평양상업학교에서 한 학기동안 공부하였는데 이 학교에서 매우 인상 깊은 교사 한 분을 만났다. 그는 후에 북한 주체사상의 기초를 다진 바 있는 사상가 황장엽 선생이다. 후에 황장엽은 남한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던 때라 방학 때면 근로봉사가 일상이었고, 이 학교 재학생들은 지금 종합체육관이 자리하고 있는 능라도로 동원되어 수원지 근처의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심기도 했다. 북한 사정이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소년 홍치모는 1947년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와 1952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그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 고난을 잘 참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 신앙의 힘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목사 설교에 감화받아 중생 체험

그는 1949년 여름방학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 당시 방학을 이용하여 부산의 고려신학교 학우회 주최로 학생수양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주경학자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려운 타향살이를 하던 그에게 박 목사의 메시지는 실로 메마른 가뭄을 해갈시켜 준 하늘의 축복의 생수였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학생 홍치모는 박윤선 목사를 평생 은인으로 여기며 그를 따랐고, 박 목사 또한 약산을 친아들처럼 생각하며 그를 거두어 주었다. 그로부터 약산은 박윤선 목사를 가까이 모시면서 그 분의 신앙과 삶을 배웠다.

 

또 그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하나는 19504월에 발생한 고신측의 분규사건과 같은 해에 발발한 동족상잔의 6.25 사변이 평생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때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역사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부친과 청소년기에 개혁신앙을 심어준 박윤선 목사의 영향은 그로 하여금 역사와 종교개혁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길로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후에 한국교회사학회 창립에도 백낙준 김양선 민경배 주재용 강근환 박사 등과 함께 주요 멤버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그이 나이 40세에 영국 유학

대학을 졸업한 후 군대에 간 청년 홍치모는 1957년부터 19618월까지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한 후, 남산에 있는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하여 5년간의 교사생활을 했다. 그리고 1967년부터 만 2년간 부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에 의료선교사로 부산에 와 있던 페터슨의 소개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Bible Training Institute in Glasgow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그가 유학했던 학교(BTI)는 후에 Glasgow Bible College로 확장하였고, 지금은 또 다른 성서대학과 병합하여 International Bible College로 교명이 바뀌었다.

 

약산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당시 학장이었던 죠프리 그로간의 배려로 글라스고대학 사학과에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 I.B.Cowan1451년 개교 이후 처음 강의를 듣게 된 한국 유학생인 그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였다.

 

약산은 대학입학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종교개혁사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신이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 본산지에 와서 사료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생활 내내 시간만 나면 신간이나 고서를 불문하고 자료수집에 정성을 다했다.

 

2년에 걸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숭의여자대학의 전임교수로 5년간 역사와 문화사를 가르쳤다. 1976년엔 총신대학교 교수로 옮겨 교수로, 부총장으로 성심을 다해 후학들을 가르쳤고, 교단에서 교역자 보수교육을 위해 설립된 목회신학원에서도 장로출신 교수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의 강의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평상적인 언어로 강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테크닉이 있었다. 그의 후학들 중에는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는 명망있는 교수들도 상당히 있다.

 

그는 총신대학교 재직시 1980년 학내 사태가 악화되어 학생들이 이사장 자가용을 뒤집어 놓는 광경을 보고 평생 자가용을 구입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학교를 출입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필자와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 학회원으로 만나 교류

필자는 지방 대학에서 은퇴 후 서울 근교로 이거해 한국교회사학연구원에서 약산과 같은 학회원으로 만나게 된 것이 그의 만년이었지만, 필자의 막내 아들이 총신대 재학 시절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한국교회사 관계 논문을 작성했는데, 그때 약산을 지도교수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일이 있어서, 후일 학회에서 만나 그 논문 제목을 이야기하며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며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약산 홍치모 교수를 이야기하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를 적시코자 한다. 그가 은퇴하기 전 사당동 총신대학교 본관 2층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약산의 강의 중 한 학생이 당시 유명한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려지고 있는 템플턴 상을 받은 서울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내용인즉, 한경직 목사가 템플턴 상을 받은 자리에서와 그 이후 뉴욕과 L.A., 그리고 국내에서 축하하는 모임 때마다 한 목사의 첫 인사가 "나는 일제 신사참배 한 죄인이 올시다" 라고 수상 소감을 밝힌 데 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약산은 갑자기 억찬 목소리로 한 목사의 그 고백은 안한 것보단 나은 것이지만, 그 고백에 대한 평가는 "Too Late, Too Late"(너무 늦었어!)이라고 해 장내가 조용하다 말고 술렁거렸다. 설명인즉, 한 목사는 한국교회 대표로, 민족복음화 대표로, NCCK 대표로, 통합측 총회장으로 할 것 다하고 받을 것 다 받으시고 한국교회가 분열 될 만큼 다 된 후에 신사참배를 뉘우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때 그 현장에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약산의 마지막 절규였는지 모른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라 여겨 여기에 기록해 둔다.

 

약산의 철학은 "사람 앞에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약산은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 구체적으로는 장로교 신앙 입장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했다. 그의 저서들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종교개혁사 1997,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983,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 혁명 1991, 영미 장로교회사 1998 등이 있다.)

 

그의 제자 채은수 박사는 홍치모 교수의 역사관과 역사 서술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다. 첫째, 친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오면서 소시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믿고 실현한 학자였다. 둘째,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신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정신에 입각하여 신행일치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셋째, 그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제하였고 인간의 양면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한계성을 인정하였다. 넷째,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에 균형을 이루었다. 다섯째, 기독교 역사가로서 교회사 서술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사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여섯째, 그는 학문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뿐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상식적인 신의와 도리를 다했다.

 

끝으로 그의 생전 총신대학교에서 함께 했던 명예교수 정정숙 박사(상담학)와의 대담 중 한 마디를 기리며 첨부하고자 한다. "교수님의 삶의 여정에 영향을 준 이념이라 할까, 정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짓말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보이는 사람 앞에서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 있겠어요? 내 철학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삶의 철학입니다. 이러한 삶의 본질이야 말로 일찌기 개혁자 칼빈이 말한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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