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방이 왜 이리 춥지!


평소에는 대부분의 날들을 중국 교포숙소 작은 방에서 지내는데 어제는 모처럼 사택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안사람이 집을 찾아온 지인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젊은이들은 주말 부부가 많다는데 우리는 아침 부부예요” 하는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모처럼 집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몸에 한기가 서려온다.
일어나 보일러 신호기를 살펴보니 빨간불이 반짝거린다. 몇 가지 방법을 취하다가 아내의 말이 보일러에 공기가 차서 그러니 보일러실을 보라고 한다. 살펴보니 선에 공기가 차있다. 공기를 뺀 후 따뜻한 방에 누워 잠시 생각해 본다.
공기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과 불가 불리한 존재 아닌가? 그런데 이놈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 한 채 엉뚱한 곳에 똬리를 틀고 않아 있으면 집안의 모두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문에는 수분(守分)이라는 말도 있다. 전에 지방에서 목회 할 때 양계장을 하는 집사님이 계셨다 한번은 그 곳을 지나다가 개장에 닭이 한 마리 죽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누가 닭을 잡아 개장 안에 집어넣었을까. 그보다는 아마 닭이 개장 안에 들어 간 것 같다. 닭이 제자리에 즉 닭장 안에 있었다면 개에게 물려 죽지 않았을 텐데 자리를 벗어남으로 변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닐까? 성서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과 창조 세계의 저주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창조주의 영역과 자리를 넘겨 본 것이 그 원인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 하셨다. 창조주와 인간의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을 조물주 하나님은 정해 주신 것이다. 인간과 피조세계의 모든 불행과 고통, 그리고 저주와 죽음은 결국 제자리를 벗어난 죄로 주어진 자업자득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탈선이요 자리 이탈이다. 기차가 레일의 벗어나고 차가 차선을 이탈하고 지구와 우주의 항성들이 자기의 고유의 자리를 벗어나게 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근본 원인도 다 각각 자기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벗어남으로 빚어진 결과이리라.
인간의 행복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누릴 수 있음을 성서는 가르쳐주고 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로다’ 라고 하였다.
오늘 아침 이글을 쓰는 중 문자가 들어왔다. “존경하는 목사님! 며칠 몇 시에 00당사로 오세요. 나라와 대선을 위해기도 하십시다. 그런데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일을 위해 어느 교회로 모이라면 이해가 되겠는데 어느 당사로 모이라고 한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꾼들을 쫓아 내셨다고 한다. 장사꾼들은 시장에서 행해 져야 할 일들이 성전에까지 침투한 사실을 질책 하신 것이 아닐까.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라는 질책이시다. 대선과 년 말을 앞두고 온통 선거 관심이 쏠려있다. 선거에서 인물이나 정책, 그리고 미래의 비전 등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정치만 만능인 것처럼 온통 거기에만 관심이 쏠려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학생은 학원의 전당에서 직장인은 회사나 일터 에서 군인은 전선에서 목회자는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려야 하겠다. 다 정치인 되고 일등만 있으면 누가 농사는 누가 짛고 나라는 누가 지켜주겠는가.
그렇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 생긴 나무가 가장먼저 잘려서 기둥감으로 쓰인다. 그리하여 나중 까지 남아있는 못생긴 나무는 산을 지키는 고목나무가 된다. 그러다가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로 쓰임 받는다. 나는 비록 거목은 못되고 큰 기둥감으로 쓰임 받기에는 모자란다 해도 내가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역사 앞에 쓰임받기를 원한다. 또한 쓰임 받지 못한들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이런 자리에 않아 있는 것만도 과분하고 감사한다. 교회마다 년 말이 되면 회의도 많고 모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회의가 (會議) 많으면 회의(懷疑)도 생기게 마련이다. 분주 할수록 우리의 기본 자리로 돌아가서 그 회의들이 영혼을 구원하기위한 회의들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자기 자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창조주의 자리까지 엿보던 사탄이 땅으로 추락하여 꾀이는 자가 되었듯이 사이비 이단들이 활개를 치는 것도 누구를 탓하기 전에 각자 자기자리에서 본연의 의무와 사명에 충실 할 때 저들의 힘 은 약 화 될 것이다. 한국 교회를 깨우는 경종으로 들려온다. 더 이상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더 나아가선 일치와 연합은 외면 한 채 교단의 벽만 높아져가는 한국 교회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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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왜 이리 춥지 - 이선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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