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삶의 궁극적 관심

영국의 작가 다니엘디포의 장편소설인 「로빈슨크루소」는 평범한 뱃사람인 로빈슨크루소가 무역선을 타고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대서양 적도로 이어진 기니아로 향하던 도중 서인도에서 좌초되어 홀로 무인도에 표착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조롭고 구성도 평이하지만 출판 당시 작가 자신도 놀랄 만큼 호평을 받아 곧 그 속편을 썼다. 이 장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모험 스토리’로, 어떤 이는 생존하려는 삶의 ‘투쟁의 스토리’로 이해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역경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신앙의 스토리’로 이해한다.
폴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은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은 삶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문제로 삶에서 궁극적 관심이 경험될 때마다 거기에는 신성이 존재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의심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실존적인 존재 또는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의 한정된 것에만 머물러 좋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데, 그것은 인간을 비존재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면 신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폴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앙은 어떤 진리 또는 교리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직접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 속에서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궁극적인 관심이 유한하고도 실존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외딴 섬에 혼자 갇혀 있던 로빈슨크루소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모험과 육체적인 일도 중요하였지만 극한에 처한 자신에게 하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는 신앙심이 우선하였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세상과 단절되고 모든 인간관계도 끊긴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목숨 부지(扶持)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한 지 9개월쯤에 로빈슨은 모기에 의해 아노펠레스란 학질에 걸려 병을 앓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성서를 읽으며 기도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이 무인도에 구사일생으로 안착한 것만으로도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깨닫고 감사했었다. 그러나 조금씩 섬에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게 되면서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가, 다시 자신이 목숨을 영위하고 있는 무인도의 자연의 혜택 역시도 창조질서에 따라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이곳에 사는가? 자연이 스스로 자라고 때를 따라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 대로 움직이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생명의 창조자가 누구인지, 그분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리를 터득하며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는가? 존재를 위해 사는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존은 가치와 무관하고, 존재의 가치를 알면 생존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향상시키기 위해 생존은 필요할 뿐이다. 성서는 이 가치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다. 결국 ‘생존’과 ‘존재’는 사람의 실존을 위한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관계이다.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상응하는 피조물, 그분이 말씀하실 수 있는 피조물, 말씀에 귀 기울이는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며, 이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관계를 맺어 창조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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