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세계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로마 교회의 ‘교황제도’
로마 가톨릭은 교황제도를 옹립하기 위해 수 많은 범죄 저질러


교황제도는 세계 교회를 분열시킨 교권주의의 결정판
베드로가 로마서 죽었다는 것 외 다른 주장은 근거 없어


한국가톨릭대사전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하게 그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황제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제도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단장이며 초대 교황이었다. △사도 베드로가 A.D. 42-43년경 로마교회를 창설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교회의 감독(주교)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67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했다. △역대 교황은 모두 로마교구 감독이었다.  △교황은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도 베드로의 수위권의 계승자이고, 교회의 최고 권위이며, 세계감독(주교)단의 단장이다. △교황은 신앙과 도덕에 대한 마지막 판단과 결정에서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당시 로마 판도 안에 있던 초대교회는 5대 교구로 유지되었다. 첫째는 예루살렘 교구이고, 둘째는 시리아 안디옥 교구이며, 셋째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이고, 넷째는 로마 교구이며, 다섯째 맨 마지막에 설치된 콘스탄티노플 교구이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이 일어나고 곧이어 예루살렘과 시리아,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 점령됨으로써 이 세 교구는 이름만 있을 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남은 두 교구, 즉 로마 교구(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동방교회)만이 남아 동·서방교회를 대표했다.
그런데 전체 교구가 참여하는 모든 교회의 공의회에 로마 교구가 수위권을 주장함으로 이 두 교회간 갈등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1073년 끝내 동·서 교회의 분열에 이르렀다. 로마교회의 교황제도가 세계교회를 분열시킨 것이다.
중세의 무고한 인민을 이단으로 몰아 학살한 종교재판소와 마녀사냥도 모두 이 교황제도를 비판하는 세력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중세의 종교개혁도 결국 이 로마교회의 교황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로마교회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로마 가톨릭교회는 로마 교황이 세상 모든 교회의 감독 중에 수위권(首位權)을 갖는다는 성경적 근거를 베드로에게 한 주님의 말씀,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과, 요한복음 21장 15-17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서 찾는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사도단의 첫째 서열인 교황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이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들인 로마 교황들에게 영구적으로 계승된다고 주장한다.
또 로마교회는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주장한다. 교황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첫째, 로마교회만이 참된 교회로서 오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참된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교단 전체 역시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셋째는 교황이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교도권까지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교회는 몇 차례 그들의 결정을 수정한 바 있다. 교리 논쟁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교황도 있었고, 갈릴레오에 대한 판단 역시 오류였다고 시인했다. 어찌 사람이 모여 결정하는 회의나 판단이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열리는 교회회의도 역시 사람이 모여 하는 것이다.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교회회의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1장 4항은 “사도시대 이후 모든 공의회와 협의회는 총회 차원이나 개별적 회의에서 항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과거의 많은 회의들에서 실수들이 범해졌다. 그러므로 공의회와 협의회는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절대적 규범이 될 수 없으며, 신앙과 실제적 측면에서 참고가 될 뿐이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베드로의 로마교회 설립설 진실인가?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교회를 사도 베드로가 세웠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초대교회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서 찾는다. 유세비우스는 교회사 제2권 제14장에서 “클라우디우스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고 은혜로우신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능력있고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로마로 왔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향후 25년간 로마의 주교로 재임했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주후 41년부터 54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교회사 학자들은 “베드로가 25년간 로마에 체류하였다는 기록은 크게 믿을 것이 못되며, 무엇보다도 연속적인 체제로 알아 들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회심 후 3년이 지나서 예루살렘에서 사도 베드로를 만났고(갈1:18), 또 이후에 안디옥에서 사도 베드로를 만났다(갈2:11). 그리고 14년 후에 다시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재회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갈2:1-10).
독일 튀빙겐대학 가톨릭 신학부 교수인 셀클레(K.H. Schekle)는 “로마교회가 처음에 어떻게 창설되었고, 그 창시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한 전통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들은 그리스도교 초기의 유명한 지방교회들의 창설자로서 12사도들의 이름을 꼽고 있지만 이것들은 믿을 만한 것도 있고, 믿을 만한 근거가 희박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통조차도 없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그렇게 이름난 전도자가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고 말한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도 대체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창시했다거나, 로마교회의 초대 감독(주교)이었다는 것은 부정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이유는 고대 교부들의 증언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초대 교황이니, 로마교회 감독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수위권을 갖는다느니 하는 주장은 다른 교구 위에 군림하려는 로마 교구의 오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특정인이나, 특정세력의 교권주의가 교회를 분열시켜 왔다. 따라서 교권주의의 화신인 교황은 세계교회를 분열시킨 교권주의의 결정판이다.
<강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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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는 8월 교황의 한국방문을 앞두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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