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부모의 자리


하나님은 혼자사는 아담에게 부인을 주어 한 쌍의 부부로 탄생케하여 한 생명을 이룬다. 이러한 부부(夫婦)를 부모(父母)라 한다. 처음 사람 아담에게 보내주신 부인이 자신의 뼈이며 살이라 하신다. 이들이 한 쌍이 되어 벗은 몸을 볼지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이는 한 몸으로 다시 살게 하신 하나임을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신다.
여기에 맞추어진 우리의 믿음도 그리스도와의 신앙의 관계가 ‘이제는 전에 멀리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엡2:13-14)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알게 하시는 것도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하는 생명의 낳음을 알게 한다. 창조의 원리를 따라 그 질서의 관계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땅에 식물이 나지 않았고 안개만 가득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음 사람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심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에 따른 에덴동산은 아름답고 좋은 생명의 열매들이 자라게 하시는 땅이었다. 생명을 가꾸기 위해서는 네 개의 강을 이루시고 여기에 처음사람에게 동산의 관리를 가꾸고 지키게 하시며 선악과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시었으나 이를 어김으로 원죄를 범한다. 여기에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말씀으로 다시 새 날을 열어 보이신다.
또한 “효” 사상의 단점으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는 수평적이며 개성, 인권존중, 자율성, 능동성, 합리성 등을 요구하는 반면, 효 사상은 개인 및 지역 이기주의 그리고 수직적 인간관계와 타율성, 수동성, 비합리성 등을 포함하고 있어, 현대사회의 사상과 상충되어 갈등을 일으키는 단점이 있음도 알게 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사를 되짚어 보면 인간은 마치 시계추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내달리다가 그 한계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왕복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동안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여 내달리어 왔다.
그러는 동안 정신적으로는 황폐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인간은 정신문화를 추구하여 내달린다. 그러나 고도의 정신문명을 이룩하게 되면 그것도 곧 세월의 흐름과 함께 교조화·경직화·화석화한다. 이렇게 다시 인간은 물질을 향하여 치닫게 된다. 과거 동양과 서양은 진동의 방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계추와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면면에서 보아 지난 20세기 초, 동양이 정신적 추구의 끝에 서 있을 때 서양은 막강해진 물질문명을 들고 동양을 침식해 왔고, 그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야 했던 동양은 이제 자극 받아 함께 물질적 추구에 열심히 매달리고 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진동을 보이고 있던 동양과 서양이지만 이제는 교통·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의 소통 공간으로 수렴되어 가는 지구촌 시대다.
동서양이 함께 물질문명의 정점에서 극도의 정신적 황폐화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신음하게 된 지금, 동서양이 함께 한 하늘이 낸 생명의 흐름을 향하여 내달리게 된 4계절에 따른 시절을 따라 흐르는 역사의 발전을 따라 열매를 맺히고 열매가 떨어져 한 생명의 씨를 거둠에서 또 한 생명의 태동을 보는 하늘의 순환이 우리의 삶의 관계에서 성서는 우주와 인류를 하나 되도록 자리 잡아준다.
“효”의 장려를 성서적으로 이해하여 신앙으로 이를 지켜가는 오늘 우리 삶이되기를 기도하면서 “부모의 자리”에서 깨달음이 있었으면 한다. 위대한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는 동양의 “효(孝)를 한국에 와서 보며” 장차 한국문화가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리”일 것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실로 오늘의 우리를 보면 살아가면서 공기나 물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숨은 저절로 쉬어지고 물도 쉽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혜와 “부모의 자리”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그와 같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아빠가 먹여주고, 입혀주기 때문에 원래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식들은 자기가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그 때부터 부모의 사랑이 내림사랑으로 “부모의 자리”를 깨닫게 되어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 이 부모의 사랑이 삶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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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리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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