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삶이냐 물질이냐


그동안 우리 경제는 초고속으로 성장해 왔고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의식주문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1963년에 1백 달러에 불과하던 소득이 1977년에 1천 달러를 돌파하고 1995년에 거의 1만 달러를 달성했으니, 비록 지금은 주춤한 상태지만 한국경제는 성장가도를 질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웠던 그 시절과 비교해서 오늘 우리는 그만큼 더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더 잘 살게 되었지만 낮은 생활의 어려움에 처한 서민경제와 부를 소유한 부유층과 빈부격차가 심해 상대적 박탈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근대화의 초기에는 절대빈곤의 해결이 중심과제였다. 70년대까지의 우리 경제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절대빈곤문제가 해결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는 끼니를 때우려는 생존욕구에서 또 다른 욕구로 변화하게 되어 경제성장률이 낮다든지, 생활수준의 향상이 느리다든가 하는 데는 무관심하고 공평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보게 된 것이다. 갈수록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종적으로 비교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나와 남, 그리고 우리나라와 남의 나라를 횡적으로 비교하게 되었다.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효율만 따지고 공평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가볍게 생각하는 데서 기인하는 데서 이러한 경제가치관의 경직성 때문에 경제의 소외지대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인들이 가지는 불만, 노사관계에서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 빈부격차에서 국민의 소외감은 우리사회의 욕구불만과 상대적 박탈감에 일어나는 '경제정의'를 알게 한다.
여기에 반해서 과학기술의 발달, 정보화, 지식화 사회로 21세기에 대한 희망도 크지만, 또한 소득 격차가 벌어져 고소득층 20%와 저소득층 80%로 나눠지는 소위 20대 80의 사회가 되어간다고 염려하는 학자들이 내다보고 있다. 이로서 경제위기는 사회구조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경제정의의 심화(深化)를 느끼게 되어 사회의 구조는 갈등의 구조를 낳게 되고 양극화 현상으로 치닫고 있다. 결속으로 일반 사회에서도 이러한 중지를 모아 '경제정의'라는 슬로건을 걸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 약칭: 경실련)은 1989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시민 단체로, 한국 사회의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주복지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에 교회의 경제관에 대한 입장은 알아야 함을 알게 한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이미 경제윤리원칙과 이에 대한 빈부관(貧富觀)의 입장을 밝힌다. 장로교의 칼빈은 이미 '경제적인 윤리 원칙'과 이에 대한 '빈부관'을 알게 한다.
또 여기서 예수의 재물관과 소유의 원리3가지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①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만드는 자의 소유)라는 것이다. ② 세상을 만드는 것 중에서 제일 되는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의 의(義)로서 그 가치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③ 세상의 것들인 재물(소유)은 종속적인 선(善)이지 최상의 선(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하늘의 것을 구하여야 한다. 먼저 구하는 것은 하늘의 것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이고 세상 것은 나중이라는 말이다.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하여야 할 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근본 문제는 경기가 나쁘다든지, 물가가 오른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한 배에 탔다는 삶의 공동체를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나와 비교해서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돈을 모은 사람이 그만큼 사회에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의 부는 나의 이익과 보완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사람의 부가 나의 이익에 설사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사람들이 남의 부에 대해서 축복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여기서 부에 대한 사회적인 존경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와 비판하는 눈을 가지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증오하며 이를 바라보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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