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아버지’여설(如說)


관계의 돈독성이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버지를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어쩌면 세상을 바꾸기보다 스스로 마음가짐이나 생각들을 달리 표현하고 갖추는게 훨씬 더 좋은 방법 일 수 도 있다.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시든, 아버지랑 진지하게 얘기를 하든 , 평소 몸에 배어 있는 습관과 생각, 행동들은 한 사람을 표현하고 더 나아가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좋게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과거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현대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어가고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가장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 가부장제적 사회를 옹호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재 비행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에 대한 범죄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과거처럼 자식교육을 어머니 혼자서 전담하는 것은 무리이다.
대체 아버지의 역할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사회적 위치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보면 자기만족보다는 나이들면 자기 얼굴 책임지라고 아주 많이 강조되지 않나 생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위 또는 삶의 완성 단계에 접어드는 중년 때에 자녀에 대한 중압감, 아내의 만족을 위한 또는 가족모두의 지위상승 효과에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 우리는 자녀에게 진정 사회적 성공만을 강조하는 스스로의 아버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요즘 사회에서 번지는 사회적 문제는 "현재 비행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에 대한 범죄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 스스로 사회적 일탈 행위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격고 있는 시대적인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 모든 이의 정서 혼란기가 조속히 시대에 모두가 적응하는 정서의 확립으로 이어가고 있다.
본문 성서에서는 아버지의 신중성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호칭이 하나도 없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게 되었다 여호와는 우리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다, 신약 성경에는 여호와란 단어는 한 구절도 없다,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을 가르치실 때에 여호와의 호칭을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다, 그 이름이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요 아들로 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불러 온다. 기독교인이면 아무나 '하나님아버지'라고 망령되게 부르는지 조차도 모른다, 심지어 여호와증인들은 우리가 그 분의 증인이라고 외치며 다니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이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백성인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하시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이지 유대인들에게 만 가르쳐주신 기도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너희'라는 이 두 글자를 착각을 하고 받아드렸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습관화되어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하나님아버지'를 기도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툭하면 말끝마다 하나님아버지가 믿는 이의 입술에 붙어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 하늘과 땅은 생명 창조이고 그 생명은 관계성 확립으로 서로 관계를 통해서 관계를 통한 서로의 삶을 누리게 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1878-1965)는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하시디즘(Hasidism)에 뿌리를 두고 관계의 철학, 만남의 철학, 대화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유대 사상가이며 그의 저서에 "나와 너"(Ich Und Du) 현대의 철학이나 신학, 심리학 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인간의 삶 근본은 누군가와의 만남이다"라는 전제하에 이어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은 두 가지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관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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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설(如說)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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