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한국에 온 최초의 미 북장로교 선교사


 
1901년 출발한 선교사공의회 시대가 1911년으로 마감되고, 1912년 9월1일~1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열렸는데, 초대 총회장으로 언더우드(1859~1916)목사가 선출되었다.
언더우드(元杜尤, H. G. Underwood)는 인간생태 차원에서는 청교도 출신 크리스챤이자, 사회생태학 차원에서는 앵글로색숀계의 피를 타고난 아메리칸이요. 유럽계에 속하면서도 세계인이며 자연생태인으로 산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 언더우드(1827~1881)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Grant Maire Underwood)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죤 언더우드는 인쇄용 잉크와 타자기, 타자기 리본, 안전수표용지 등을 개발하여 영국 왕실예술원으로부터 공로 메달과 표창을 받기도 했다.
훗날 죤 토마스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맏형 1857~1937)는 부친의 사업을 계승하여 유명한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경영하게 되었고, 그 기금으로 연희대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선교자원운동이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며 인도선교사를 꿈꾸었다. 하지만 조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뉴스에 접하고 조선선교사를 지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무렵 뉴욕에 있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수락 답장을 우체통에 넣으려는 순간,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조선은 장차 어쩌란 말인가?’라는 마음의 음성을 들었다. 언더우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후 북장로회 선교본부를 방문하여 조선선교사를 다시 한번 지원하였다. 선교본부는 알렌(H.N.Allen)에게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전하라는 전보를 친 후 꼭 6일 만인 1884년 7월 28일에 언더우드를 조선선교사로 지명하였다.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885년 1월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 일본주재 의료선교사 햅번(J. C. Hephurns)의 집에서 얼마동안 유숙하였다. 그 곳에서 이수정 및 다른 조선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면서 그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때 요꼬하마에 도착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 1858~1902)목사 부부와 스크랜턴(M.F.Scranton, 1832~1909)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부산을 경유,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입성한지 사흘만인 4월 10일부터는 알렌이 원장으로 있는 제중원에 자리를 잡고 제중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 청년들에게 의학을 겸해 화학과 과학 과목까지 가르쳤다. 하지만 일본에서 배운 조선말 실력으로는 사역 현장에서 진전이 없을 것 같아 언더우드는 어학교사를 두고 열심히 한국어를 익히는 한편, 어학훈련의 일환으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개정작업과 영한사전 편찬 작업에도 열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말로 설교할 수 있었다. 언어 문제가 해결되자 다음 그의 목표였던 교육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1886년 5월에는 ‘번개비’라는 별명을 가진 6살 짜리 고아 한명을 데려다가 고아원 사역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뉴욕대학 재학 중 구세군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봉사한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정동장로교회’설립
그 후 언더우드는 1887년 부터는 벽지 전도와 함께 한국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 참여하였고, 그해 9월 27일엔 서상륜의 도움으로 14명의 조선인들이 모여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전신이었던 정동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위치는 현 정동제일감리교회 맞은편). 그는 교회 내에 신학반을 설치하고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조선선교사로 오기 전 뉴욕에서 고등학교와 뉴욕대학(New York College)을 졸업하고, 뉴부른스윅(New Brunwick Seminary) 개혁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3년간의 신학과정을 마친 1884년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의 꿈을 품고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와서 선교를 펼치는 데 이러한 고등교육을 받은 것이 그의 사역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성경과 신학을 배운 젊은이들은 경기도 양주군, 양평군, 김포군, 고양군, 시흥군을 비롯 여러 지역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교회를 열거해 보면 서강교회, 시흥교회, 서교동교회, 김포교회, 능곡교회, 고양교회, 멀리로는 구미 상모교회를 비롯 초기에만도 20여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장사역뿐 아니라 1896년 4월 26일에는 조선어 문법과 한영자전을 편찬 발간하였고, 6월에는 오늘의 대한기독교서회(C.L.S)의 모체였던 조선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를 조직 문서선교 사역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정동장로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함께 부를 찬송가가 없어 불편을 느꼈던 언더우드는 찬양가(150곡)를, 낱장으로 제작하여 부르던 악보를 모아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찬송가를 발행하는데 까지 이르렀다(1892년).
언더우드는 왕비의 시의로 봉직하고 있던 미 북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릴리어스 홀튼(Lillias Horton)과 1889년 3월 14일 결혼하여 총각신세를 면하였다.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 송도, 평양, 강계를 거쳐 국경도시인 의주까지 방문하였다. 이 여행이 겉모양은 신혼여행이었지만 사실상 조선의 지방순행전도여행이었다. 언더우드가 의주(義州)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소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매켄타이어(Mckintyre)와 서상륜 김진기 등의 조선인 성경번역가들의 활동에 힘입어 의주 신앙공동체(교회)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혼여행 중에 33명에게 세례베품                
언더우드는 그들 중 100여 명의 세례지원자들과 면담한 후 33명에게 압록강 건너 중국 쪽 강변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는 또 다른 자생적(自生的) 신앙공동체인 황해도 소래교회(松川敎會)를 보고 자신은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추수하러 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정동장로교회 설립자인 14명 중 13명은 서상륜이 전도한 교인들이었고, 나머지 1명인 노춘경 역시 언더우드의 전도가 안닌 성경을 읽다가 스스로 신앙의 도리를 깨닫고 입교한 신자였다.
안식년을 맞이한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1981년 6월에 모교인 뉴욕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D, D) 학위를 받았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omick)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조선선교보고’ 강연을 하였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윤치호와 함께 네쉬빌에서 모이는 ‘전국신학생 선교대회’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였는데, 이때 미 남장로회 직영신학교인 리치몬드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1867~1951) 죤슨 전킨(Johnson Junkin) 부부, 테이트(Tate) 남매, 데이비스(Davies) 등 7명이 선교사로 지원하여 선발되었고, 이들은 1882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그해 11월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호남지방에 배정되어 이 지역에 교회를 성공적으로 세우고 성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성경번역과 문서선교에 역점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내한한 언더우드는 1896년 언더우드 역 ‘누가복음’을 번역 간행하였고, 1897년에는 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을, 1905년 11월에는 ‘The Korea Mission Field’라는 선교소식지를 창간하였다. 고종(高宗)황제로부터 언더우드의 공로를 인정하여 1906년에는 명예스러운 태극(太極)훈장을 하사 받기도 했다.
이후 언더우드는 자기가 세운 경신학교(敬新學校)를 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1912년 아들 원한경(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의 대학 졸업식 참가 겸 미국을 방문하여 대학설립기금으로 52,000달러를 모금해 귀국하였고, 그해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교육사업 근대 한국 학교교육의 기초
그후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병설하여 교감으로 취임하였으며, 이어 1917년 4월 7일 배재학교(培材學校)와 연합하여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초대교장으로 취임,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변모 발전하는데 필요한 기틀을 닦았으며,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교정 한 가운데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늠늠하게  세워져 그의 후학들과 한국의 기독교가 그의 정신을 함께 기리고 있다.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간 언더우드는 과로로 쓰러져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애틀란틱에서 5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 Union Hill에 묻혀 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지난 1999년 5월 20일 선교지였던 대한민국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그의 부인 릴리어스 곁에 이장해 영면했다. 그의 묘비에는 “Horace G. Underwood, Reburied Here, 20 May, 1999”라 새겨져 있다. (양화진 제2묘역 다-11번이 그의 묘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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