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그리스도의 삶의 정도를 보여준 개혁주의의 대표적 목회자


 
강원도 희양군 내금강 자락에서 자라
한병기(韓秉奇 1913. 4. 16~2004. 11. 4)목사는 1913년 4월 16일 강원도 희양군 내금강을 끼고 자리잡은 기독교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금강 산자락에 위치한,  교회가 운영하는 영화의숙(永華義塾)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14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고배(神戶)에 있는 중앙신학교 학생이었던 김성태의 주선으로 그곳에서 한인교회인 이마미야(今宮)교회에 출석하며, 야간에 한 소학교에 다니며 정규교육을 받고 난 후, 세미기(成器)상업학교로 진학하여 5년간 다니고 졸업하였다.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는 다시 북부교회로 옮겨 이 교회에서 입교(入敎)문답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으로 성실하게 봉사하며 헌신하였다.
세이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요대학(關西大學)에 입학하여 조국해방 후를 준비하기 위하여 법학(法學) 전문부 3년과 6년간 법률학을 전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일본 유학에서 법률공부
한병기는 원래 문학(文學)을 좋아하는 문학도였으나 변호사가 되어 압제받는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쓰임 받고자 신념을 가지고 법률학을 공부했다. 그는 재학 중에 만주국(滿洲國) 고등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하지만 세월에 밀리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천국 건설사업을 위한 목사(牧師)란 지도자로 변신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종종 언급하기를 “나는 육법전서를 성경전서로 바꾸었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 법정의 변호사 자격을 주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6.25사변으로 북쪽으로부터 월남하여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과 난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내 민족들을 변호하며 하나님나라 확장에 심혈을 다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도 하고 몇해동안 교편(敎鞭)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뜻하지 않은 6.25전쟁의 발발로 국군이 북진한 다음 1950년 12월 8일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남하 하기 어려운 연로하신 부모님과 처자들을 두고 “잠시 다녀 오마”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눈이 몇길이나 쌓인 산길과 들길을 헤쳐  떠난 것이 지상에서의 54년이란 긴 세월을 목회를 하면서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살았다.
그는 홀홀단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동해안을 따라 통천을 거쳐 처가(妻家)가 있는 경상북도 김천에 도착한 것이 1951년 2월 초순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첫 겨울이었다.

일생을 부산 부전교회에 바친 사람
혼자서 잠시 처가에 머무는 동안 금강산 시절부터 친구였던 김형식목사가 부산에서 목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김목사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면서 당분간 함께 교회에 머물면서 자기의 목회사역을 돕기를 원했다. 그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김형식목사가 신학공부를 그에게 권하였다. 그는 깊이 기도한 후 당시 대구에 피난 와 개교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 본과에 입학하였다.
평소 할아버지께서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해 주시던 음성이 불혹의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연후에야 할아버지의 하시던 말씀이 문득 깨우쳐지는 것이 아닌가.
대구에서 공부하는 동안 전도사로 섬긴 교회가 대구 문화교회였다. 당시 문화교회 담임목사는 그 유명한 부흥사 박용묵(朴容墨)목사였다. 박목사는 한병기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북부교회를 함께 섬긴 분이었다.
드디어 1953년 7월 17일 3년을 넘긴 전쟁이 휴전되고 서울의 수복과 함께 대구에 있는 총회신학교도 수도 서울로 올라갔다. 한병기 역시 학교를 따라 서울에 올라가 계속 학업을 마치고 그해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한병기전도사는 졸업 한달만에 김형식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부산 부전교회의 전도사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김형식목사가 세워 운영하고 있는 복음학원(福音學院)과 성민중학교(聖民中學校)를 맡아서 어렵고 힘든 젊은이들에게 앞날의 희망을 주기위해 교육사업에도 힘을 썼다.
한병기전도사는 1955년 7월 19일 당시 경남노회 노회장이었던 노진현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부전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6년 1월 부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형식목사가 사정에 의해 사임하게 되자, 부목사로 있던 한병기목사는 복음학원의 일을 내려놓고 목회사역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듬해 1957년 11월 부전교회 위임목사(委任牧師)로 취임, 본격적인 부전교회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목사는 목회를 하는 가운데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어 1966년 3월부터 총회신학대학 대학원에 진학, 학국신학계의 태두(泰斗) 박형룡(朴亨龍)박사 밑에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전공하고 학업을 마쳤다.
한병기목사는 교정(敎政)에 참여하여 여러가지 모범적인 역사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 그는 총회에서 70세 정년제를 발의했고 자진해서 70세에 은퇴 함으로 선진적 사고와 모범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한목사는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후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와 담임목사직을 두루 겪으면서 30년의 참목자의 삶 부전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부산 경남지역을 뛰어넘어 교단적인 차원에서도 모범적인 목회자로 지도자적인 삶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부산교계와 일반사회로부터도 그를 가리켜 “개신교회 지도자로 성자(聖者)적인 삶을 산 지도자”로 회자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성실함과 진실된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빈과 섬김 그리고 성결한 삶
그가 평생을 섬겼던 부전교회 80년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부전교회 80년사 p.121).
“한병기목사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 한다면 청빈과 섬김 그리고 성결(聖潔)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삶은 그대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그 무게를 더해 주었다.”
한병기목사는 개혁주의(改革主義)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 하기를 “개혁주의(Reformism)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여러가지 진리와 사상을 조직하고 체계화 한 것으로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구원의 예정, 이신득구, 성도개위제사 그리고 바른교회관, 세례관 등을 내용으로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병기목사가 평생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서 목회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먼저는 그의 저서들이고, 다음은 그의 장례예배 때에 선포된 강론과 조사(弔辭)들이다.
2004년 11월 8일 그의 천국환송예배에서 조사를 한 증경총회장 이성택목사는 “목사님의 지(知) 정(情) 의(意)로 다듬어진 신앙인격의 모습과 신학과 교리로 조화된 강론과 저서들은 고 박형룡박사님의 수제자로서 한치의 손색이 없는 주옥같은 성업(聖業)이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목사 역시 “진정한 목회자로 신학자이셨던 한병기목사님! 삶으로 신학을 하시고, 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도(正道)를 보여주셨던 목사님! 평생 칼빈선생을 사모하셨기에 얼굴도 칼빈을 닮으신 목사님!”이라고 그의 신앙과 인품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을 보면 ‘진리와 사랑’‘창세기 강론’‘출애굽기 강론’‘성경 66권의 그리스도’‘성경인물 강론’‘개혁주의 강론’‘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적 교리’‘남아있는 그리스도의 그루터기’ 등 10권이 넘는다.
강단을 지키며 365일 새벽설교와 52주간의 주일설교 및 수요일  설교준비에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한는 목회자로써 따로 신학적인 글이나 성경을 강해하는 책을 집필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한목사의 저력이나 그의 연구자적인 정신자세가 돋보이는 저작들이라 생각된다.
그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민족의 비극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상태와 북에 두고온 부모처자와 가족들을 생시에 만나 보지 못하고 간 그의 통일염원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주여 어서 이 민족의 통일을 성취시켜 주소서”라는 기도는 그가 소천하기 전까지 가슴 속에 지닌 기도의 제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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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63회 총회장 한병기(韓秉奇)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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