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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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목사(1928~1987)는 1928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383번지에서 부친 이운성집사와 모친 장성금집사 사이에서 3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15세 때 세례(洗禮)를 받고 안동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예과와 본과를 마치고, 1955년 경안(慶安)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군목(軍牧)으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군목 재직시 여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1957년 11월 예편과 함께 대구에 있는 봉산교회에 부임했다가 만 12년이 되던 해에 대전중앙교회 양화석목사 후임으로 부임하여 1987년 작고하기 전까지 시무하였다.
그가 봉산교회에 부임 후 노회 안에서나 총회 안에 서서히 그의 정치력이 발흥하였고 그의 박력있는 리더쉽에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영남지방의 중심지 대구에 있던 그에게 그의 대전중앙교회의 부름은 지역적으로나 그의 능력으로 보아 교단 전체를 이끌어가고 아울러 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갔다.

대구 봉산교회에서 대전중앙교회로
대전에 부임한 그는 교회성장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교인 증가로 새로운 예배당 건축 과제가 대두되었다. 대구보다 영역은 좁았지만 대형교회로 선두를 달리게 되었고 이러한 그의 목회 리더쉽은 자연히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른바 교정(敎政)의 무대 한 가운데 중심 인물로 부상되어 간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영남지역 거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반대 세력의 J목사의 말 “내가 교단내 모든 사람들을 다 이겼지만 이영수목사에게만 졌다”고 실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목사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이룰 정도로 서로 달랐지만 그의 지도력에 의해 교단을 일사천리로 원만하게 이끌어 가며 교단의 구심점이 되어 예장이 한국 전체 교단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하여서 만은 양쪽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교단 안에 끼친 대표적인 인들로는 교단부흥의 기초석이 된 일만교회운동 전개사업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1973년 여의도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Billy Graham Grusdde)와, 그리고 이듬해 8월로 예정되었던 전국규모의 Explo’74전도대회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이끌고 있는 김준곤목사의 야심찬 계획을 간파한 이영수목사는 1974년 1월 17일 교단 지도자 20명을 대전 유성관광호텔에 초대하여 교단의 진로와 발전을 위한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비생산적인 교권쟁탈전을 탈피하고 교단의 힘을 전도와 부흥, 교단발전을 위하여 힘을 모으자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지도자모임의 산물이 <일만교회운동>이었던 것이다.

1만교회운동 전개
여기에서 다짐한 결의문을 보면, (1) 우리는 우리 총회의 부흥발전을 열망한다. (2) 우리는 1980년대까지 일만교회운동을 전개한다. (3) 우리는 국내의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합의가 그해 9월 총회에서 교단정책으로 채택되어 교회성장운동과 교회개척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일만교회운동의 실행위원과 기획실장을 맡아 전국교회로 하여금 교회개척과 적극적인 전도운동과 더블어 해외선교와 병행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순회집회와 교단 소속 부흥사들을 동원, 도시와 농촌을 무론하고 교회 확장운동과 전도집회를 이끌어 갔다. 이 운동은 단순히 숫자적인 <일만교회>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합동측 교단 안의 모든 개교회로 하여금 선교와 전도, 구제와 봉사,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확인과 실천에 지대한 각성과 결실을 가져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운동이 자극제가 되어 장로교의 타교단에서도 3천교회운동, 5천교회운동, 300만달성운동으로 확산되어 가는 불씨가 되었다. 이같은 일은 이영수목사의 리더쉽이 이끌어낸 전도운동이었다.

총회회관 건립
다음으로 이영수목사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총회회관> 건립을 들 수 있다. 그는 총회 일만교회운동을 이끌어 가면서 교단의 발전에도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목사는 합동교단이 장자교단을 자처하면서도 마음놓고 총회업무를 볼 수 있는 건물이 없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즈음에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이미 총회회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총회회관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목사는 1959년 총회가  분열되면서 당시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던 선교부가 통합측으로 가버린 후, 예장은 총회가 업무를 볼 안정된 장소가 없어 장충교회에 사무실을 대여해 이곳 저곳으로 보따리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총회회관 문제는 1968년 5월 제53회 총회에서 결의되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3년 7월에 영등포구 여의도동 1-708번지 203평의 부지를 매입, 총회센터 건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후 이목사가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총회를 섬기면서 1980년말 지하 2층 지상 10층의 건물을 건축하기로 했으나 각종 건축규제가 심해 여의도 부지를 매각하고, 1981년 8월 당시로서는 허허벌판이었던 강남구 대치동 산 36-4번지에 560여평의 현 총회회관 부지 매입을 주도하였다.
이때 반대 세력들은 이목사의 독단 무모한 사업계획을 우려하면서 재정적 도움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목사는 이곳이 곧 서울 강남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오늘의 총회회관이 이미 설계되어 있던 설계대로 교단 행정 중심센터로 자리잡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보면 그의 패기와 선견지명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총신대학교의 양지캠퍼스 마련
세번째로 그가 이룩한 업적이 있다면 오늘의 교단 인재 양성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총신대학교의 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목사는 자기의 모교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총신을 아끼고 성장시키고 사랑하는 인물이요 지도자였다. 그가 총회직영신학교 재단 부이사장과 이사장 시절 1981년 3월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 41-1번지의 22만3329평의 야산을 매입하여 동작구 사당동 캠퍼스에 이어 제2대학캠퍼스를 꿈꾸며 총신대학교를 세계적인 청교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요람으로 우뚝 서게 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영수목사는 정부가 대학 지방 분산 정책을 발표하기 전부터 탈(脫)서울 계획을 세우고 총회센터 부지와 함께 동시에 신학교 부지 물색을 진행시켰다. 학교당국은 여러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적당한 땅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용인시 양지에 당시 백화소주사장 강정중씨 소유 야산이 회사의 채무관계로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영수목사는 즉시 강사장을 만나 구매 교섭을 하였다.
5억짜리 땅을 깎아 4억2천만원에 매입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그중 5천만원은 강사장이 학교에 기부(헌금) 하기로 해 실제 지불액은 3억7천만원에 해결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땅에 이미 심어놓은 유실수 및 관상수가 당시 싯가로 1억원에 이르는데 이것까지 넘겨 받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2억 7천만원에 총신부지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총회 세계선교부 창립
또 한 가지를 이야기 한다면 총회세계선교부(G.M.S)를 말할 수 있다. 이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대전중앙교회에서 1983년 정홍권선교사를 미국에 흑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한 바 있었고, 1985년엔 김효곤선교사를 독일에 파송한 바 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교단차원에서도 선교사 파송의 필요성을 느낌과 함께 선교사 양성을 위해 초교파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총회직영 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1972년에 조직된 한국해외선교단체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고, 그런 토대 위에 오늘의 총회산하에 있는 세계선교훈련원의 기초와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2013년말 한국교회가 해외파송 선교사 총수 23,331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예장합동 소속선교사임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찬송가 통합에 공헌
마지막으로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통일찬송가의 발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개편찬송가’로 나뉘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 일에 주도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여러가지로 나누어진 찬송가를 하나로 묶는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단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하나의 ‘통일찬송가’로 묶는 작업은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기여하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뒤늦게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국찬송가공회의 공동회장이 된 이목사는 교단의 힘을 배경으로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찬송가를 통한 복음선교와 교단간의 일치와 연합뿐 아니라 선교에 큰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찬송가공회 이름으로 통일찬송가 10만부를 인쇄해 군선교회에 기증한 것만 보아도 찬송가연합의 일이 개인적인, 또는 개교단적인 소승적인 이익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 유익과 미래선교의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갔으나 그가 끼친 복음의 열정과 확산 인재양성의 높은 이상은 길이길이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할일을 다하고 1987년 12월 2일 한참 일할 나이인 60세로 생을 마감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는 또힌 짧고 굵게 살아간 교단의 걸출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한국교회의 거인(巨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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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65회 총회장 이영수(李榮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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