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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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이퇴계의 후손
이원영목사(1886. 7. 3~1958. 6. 21)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조선의 거유(巨儒) 이퇴계(李退溪)선생의 14대손, 이관호(李觀鎬)씨를 아버지로, 김영(金永)씨를 어머니로 1886년 7월 3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15살에 이종헌(李鍾軒)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불행하게도 결혼한지 3년만에 18살의 청년으로 부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곧 고성인(固城人) 이승건(李乘建)씨의 차녀와 다시 혼인을 하였으나 다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년 이원영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시 경주인 이한제(李翰濟)씨의 장녀 김기출(金其出)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이원영은 1911년 3월 24일 사립 보문의숙(寶文義塾)을 통해 한학을 연수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보문의숙에 들어가기전 1891년 3월(5세)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그의 총명함이 들어났다고 한다.   1908년 4월 5일에는 봉성 측량강습소(鳳城測量講習所)를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화 된 조선의 뜻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민족은 드디어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기미년(己未年)에 전국적인 독립만세 사건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하던 때에 이곳 안동군 도산면(陶山面)의 다수 종족(宗族) 중에서도 단신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위국충의(爲國忠義)의 불굴의 정신으로 시위를 하다가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으며, 감옥에서 복역(服役)하던 중 동료들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고 기독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3·1 독립만세로 첫 투옥
출옥 후부터 열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20리나 되는 원거리에 있는 예안교회(禮安敎會)에, 매주일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교사상으로 짙게 물들어 있는 종중(宗中)어른들의 비난과 가족들의 반대로 한때는 역경과 핍박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가까운 친족들과 가족들이 합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퇴계 선조의 후예로써 서양종교인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수치요 우리 조상들에게는 용납못할 죄악이니 문중(門中) 밖으로 축출하고 족보(族譜)에서 제명한다는 위협을 당하였으나 이원영의 결심은 이미 죽음이라도 각오한 듯 불변의 신념으로 믿음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결단으로 지금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맞은편 담촌(錟村)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드디어 1921년 1월 8일 예안교회당에서 권찬영(Rev. Crothers 權燦永)선교사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입문이 되는 세례(洗禮 Baptism)를 받았고, 이듬해 1922년 2월 25일에는 안동성경학원(安東聖經學院)에 입학하여 봄과 가을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계속해 우수한 성적으로 1925년 12월 23일 졸업하였다. 이어 1930년 3월 12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경안노회(慶安老會)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같은해 6월부터 강도사로써 영주중앙교회와 용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2월 18일 경안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31년 12월 28일 안동 인노절기념성경학원에 교수로 취임하여 열성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1932년 12월 20일 안동읍에 위치한 안기교회(安奇敎會, 안동서부교회 전신)와 신세교회(新世敎會 현 동부교회 전신)의 시무목사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
1934년 12월 19일 제24회 경안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젊은 이원영목사는 선비의 후손으로 본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교정의 한 가운데 서게되었다. 1939년 5월 31일 드디어 전국을 휩쓸던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문제가 안동지방에도 불어닥치게 되어 이원영목사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안동경찰서에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혹독한 고문과 극악무도한 체형(體刑)에도 의연한 태도와 어조, 그리고 부동의 신앙으로 무정한 법관도 신앙의 숭고성에 머리를 숙였고 미약한 성도들에게 격려의 경종(警鐘)이 되어 당시 조선 교계에 신앙의 정맥을 보존케 하였다. 그러나 연약한 육체는 악형(惡刑)을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폐렴과 건성근막염으로 몸이 쇠약해져 사람을 식별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보는 이들이 모두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야만적이던 일본경찰당국도 할 수 없이 보석(保釋)케 되어 본가에 돌아오게 되자 병세도 많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6명의 딸만 있던 집안에 유일한 후사가 될 아들 요한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천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보게 하였다.
1941년 7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안동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어 가족들도 모르게 포항 영덕 경산 등의 경찰서로 전감(轉監)되면서 무쌍(無雙)한 고문을 또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님을 향한 돈독함은 변함이 없었고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좌지우지 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제하 36년의 지옥같은 생활에 벗아난 해방과 함께 드디어 16일 출옥하게 되자 당일부터 여러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침체된 교회와 오염된 신앙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죽었던 것 같았던 교회들이 생기를 얻게되고 우후죽순격으로 부흥되어 신앙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교계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게 되었다.

경안고등성경학원 창설
해방된 이듬해 1946년 9월에는(5일) 경안노회의 이름을 따라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해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처음 입학생이 18명이었다. 이들을 학생으로 받아 제1회 개학식을 안동교회에서 거행하고 성경학습은 교회 하층에서 시작하였다. 19명이 기초가 되어 매월 한 두명씩 불어 나더니 나중엔 30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기적이 따로 없었다. 이목사의 강의는 하루도 빠짐이 없었고 한시간도 결강이 없었다. 하교시간이 되어도 이목사는 귀가할 줄 모르고 늦게까지 학교를 지키며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이런 완벽한 준비와 기도로 진행되다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안동지방의 기독교지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세기의 미국에 침체된 교계에 디·엘 무디(D.L. Moody)목사가 세운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출신들이 쇠퇴해 가던 미국교회에 새바람을 이르키며 세계선교에 이바지 했던 역사가 경산도 안동에 있는 경안고등성경학원에 같은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교계지도자를 키웠다. 그 결과 1975년 현재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목사의 수가 46명 지도사 100명이 넘고 있다.
그는 1950년 11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세번째 경안노회장에 피선되어 1953년 11월까지 4차, 5차 노회장으로 노회와 안동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섰다. 그리고 전쟁이 겨우 휴전으로 진정된 직후 혼란기를 맞이했던 1954년 4월 23일에 한국장로교회의 최고의 명예로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총회장시절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서 채택
그가 총회장으로 수고하던 그해에 결의된 안건들을 보면 ① 제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② 신사불참배 교역자와 신자, 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학교 각기관에 명하여 그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하였으며 ③ 제38회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한인교장 박형룡박사, 이사장에 안두화 선교사를 선임하여 대구서문교회에서 정식 취임케 하였고 ④ 경기노회를 경기 강원노회로 분립을 결의하였다.
그는 올곧은 정의로움과 관용의 선비 정신으로 어떠한 불의와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종된 사명을 다한 진실한 지도자였다. 서울영락교회 한경직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추모하는 글에서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런 성직, 실로 값진 것은 한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하나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라고 썼다.
또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한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이목사님은 참신자, 참 애국자, 참목회자라고 평가하였다. 한 지방에서 평생 친구로 동역자로 안동교회 원로요 증경총회장이었던 김광현목사는 첫째, 애국자이셨다. 둘째,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광복 후엔 경안성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로 서부교회를 개척성장시켰으며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하였다(영원한 스승 이원영목사 김성년 외 공편 기독교문사 2001 p.15, 45).
이원영목사는 무엇보다 한지역에서 평생 헌신한 지도자였고 교회를 세우며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양성으로 교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일제 당시 당국으로부터 당한 체벌의 영향으로, 또 광복 후엔 교회재건과 뒷수습에 전력을 쏟아부어 헌신하였으나 이로인한 과로와 노쇠로 육체의 질환의 재발로 3년간 누워 지내며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58년 6월 21일 그가 그렇게 사모하며 바라던 주님의 영원한 품에 고요히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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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39회 총회장 이원영(李源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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