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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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 출신, 단신 월남
안중섭목사(1918-2004)는 1918년 7월 9일 황해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중동) 210번지에서 아버지 안용수(安容洙)와 어머니 김사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생 승섭(承燮, 1920. 8. 15), 팔섭(八燮, 1026. 3. 16), 봉섭(鳳燮, 1929. 1. 5)이와 여동생 화섭(花燮, 1923. 3. 15)이 있었으나, 단신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는 알길이 없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교회에 나가는 형제들이 없었고 혼자 유년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젊었을 때에는 중화장터의 씨름판에 나가 황소 한마리를 상으로 타 집으로 몰고 왔을 정도로 우직한 성품이었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같은 성품이 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나 성경말씀과 배치되는 일은 절대로 타협 못하는 올곧은 성격을 평생 유지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안목사는 처음 예수 믿었던 시절에 겪은 사건에 대하여 안재정목사가 출판한 <원로 목사행전>(목양사 1977. p.127-129)에 보면, 어느 해인가 한번은 조상기일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보통때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올 수 있었는데, 이 날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백부(伯父) 댁 식구들과 안목사 가족들 그리고 숙부(叔父)님 댁 식구들까지 대소가 가족들이 모여 차례대로 조상의 신위 앞에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제사지낸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식들의 도리이니 우상숭배가 아니겠지 하는 생각과,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야 하나님 외에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하고 섬기면 우상이야 하는 생각으로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과 상의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 순간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예배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기도했다. 몇 시간이 지나 집에 왔을 때는 제사가 이미 다 끝나고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른들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음으로 쫓겨나던 말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는 제사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냅다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따라 나오신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할머니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셨다고 했다. 안목사는 “이 날이 내가 예수 믿고 처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린 날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날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서당에서 한문공부해 한시 즐겨
안중섭목사는 일찌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과 명심보감(明心寶監)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마치고 시경(詩經)을 배우다가 신학문이 들어와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그는 생시에도 한시(漢詩)를 좋아하고 즐겨 외웠으며 설교에 응용하기도 했다.
당시 학교생활이란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시 시국상황이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한 야심으로 철도부설과 도로공사 비행장 신설에 혈안이었고 심지어는 군수품 공장과 염전에까지 학생들을 동원 1년 중 절반은 보국대란 명분으로 노동판에 끌고 나갔으니 학교생활이 재미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갔다. 안목사는 이러한 한심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살맛나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도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영접한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 나도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시대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판국에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의 길, 목사가 된다는 결심은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거느리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아내(이섬녀, 1920. 3. 19)와 첫아이 은신(恩信, 1942. 1. 5)이까지 있는 한 집안의 장남으로써 가사(家事)를 포기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상황이 아니었다. 더우기 일제 말엽이라 평양신학교가 이미 휴교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안목사에게 드디어 상상하지도 못했던 8월 15일 민족해방의 날이 다가 온 것이었다.

한때 경찰에 지원 순경생활도
안목사(당시 집사)는 우선 사회질서 확립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동안 경찰에 뛰어들어 순경이 되었다. 고향 중화지서에서 근무할 때 동리에서 해방을 맞이해 기념하는 동네 굿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변 모래밭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유명한 무당 다섯을 데려다가 큰 굿판을 벌여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동리에 있는 각 기관과 유지들이 기부금을 낸다고 야단이었다. 일제 때 천황을 섬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 막 해방이 되어 자유를 찾았는데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무당을 데려다가 굿판을 벌리며 미신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기관에서까지 이를 권장하며 기부금을 내고 백성들에게 우민정책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안중섭 순경은 지서장에게 이번 동네 굿은 못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백성들이 해방을 기념해서 기쁘게 놀아보자는 것인데 반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가버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당에는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사상에는 돼지머리가 올라와 웃고 있었다. 무당들은 돼지머리에 돈을 꽂은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안순경은 총을 들고 굿판에 나가서 굿을 못한다고 큰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안순경은 총을 공중을 향해 한발 쏘았으나 여전했다. 안되겠다 싶어 총구를 무당을 향해 걷어 치우지 않으면 쏘겠다고 했더니 무당과 모인 무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쳐 굿판은 막을 내렸다.
사실 8·15의 감격은 잠시였고 2~3개월이 지나자 북쪽엔 붉은 군대 소련군이 신의주와 만포로부터 진주하게 되더니 갑자기 공산주의(共産主義)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경찰서가 내무서(內務暑)로 바뀌게 되자 안순경은 사직하였다.
그때 마침 개교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북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제대로 신학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곳에서의 신앙을 유지하기란 생사를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자 안중섭은 1년의 신학을 마치는 둥 마는 둥 이젠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이르자 38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다. 북쪽에 가족을 두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온 안집사의 삶도 평탄할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남쪽에서 목회
곧 터진 6·25전쟁으로 안목사는(당시 전도사) 경상북도 청도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 곳에서 청도신읍교회를 거쳐 동곡교회 전도사로 후엔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다가 경청노회가 설립될 때 창립노회장(1962)을 역임한 후 수원제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로 목양지를 옮겼다.
수원제일교회에서(1966부임) 교회 앞에 선언한 안목사의 목회철학은 ① 주일성수 ② 온전한 10의 1조 ③ 배가 전도 ④ 교회개척 ⑤ 의로운 교육이었다. 안목사의 5대 목회철학은 바로 자기의 일생 실천하고 겪었던 신앙철학이기도 하고 목양의 지표이기도 했다(수원제일교회 50년사 2004. p.237~305).
안중섭목사의 목회관을 이야기하면서 특기해 둘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6·25동란 직전, 신학교 재학 중 강원도 횡성군 소재 공근교회 전도사로 사역할때 겪은 고난의 승리 사건이다.
오늘날처럼 국가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식이 아니고 국기에 대한 배례라고 하면 선 자세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던 시기에 자기교회 국민학교에 다니는 김안위라는 학생이 아침조회 때 안전도사에게 배운대로 절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낸 사건이 터졌다.
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달했을 때, 그 학생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국기에 대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했다고 했다.
이 일로 안전도사는 1950년 1월 20일 강원도 횡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는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었다. 춘천 구치소로 이감되어 있을 때 어떤 군목이 면회를 와서 “당신을 위해 전국교회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를 했다. 이 일로 인해 최동진목사 이영수전도사 등의 연명으로 경무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하게 되었고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국기에 대한 배례가 오늘의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뀌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안중섭목사의 투철한 성경적인 신앙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어여삐 보셨던지 하나님께서 1986년 9월 제71회 합동측 교단 총회장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이룩된 몇가지 사역을 열거해 보면 ① 총회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② 교단적으로 어려웠던 이영수목사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③ 손영준교수가 개인적으로 이끌어 오던 선교훈련원(M.T.I)을 오늘의 세계선교훈련원으로 정착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은퇴 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수원제일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노회와 총회 일을 염려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나다가 2003년 10월 예상치 못한 뇌졸중으로 병상생활을 100여일 신고하다가 2004년 1월 13일 오전 1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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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71회 총회장 안중섭(安仲燮)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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