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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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출생
정규오목사(丁奎五, 1914. 10. 14~2006. 1. 19)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용동)에서 정효순(丁孝純)씨와 강누동(姜樓洞)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1907년 9월 18일엔  조선장로교 7인의 목사가 탄생했고, 목사 장로가 중심이 되어 노회(老會)가 형성되었고, 또 1912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총회가 조직된지 2년째 되는 해인 1914년 장차 그 총회를 위해서 사역할 한 주의 종이 조선의 남쪽 끝 나주(羅州) 땅에서 태어났다.
나주는 공교롭게도 이 지역을 선교지로 위임받은 배유지(Rev.Bell Eugene 裵裕址)목사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유지 선교사가 그토록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몸 바치고 헌신했던 그 땅에 앞으로 그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정규오가 태어난 1914년의 방산(芳山)지역은 이미 1896년(고종 33년)에 한반도에 13도 제도가 시행되어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어졌는데, 전라남도로 나누어진 1896년에 전남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지역은 당시 전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였다. 그해 11월에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이눌서(Rev. Reynoles William. D)와 배유지 선교사는 함께 전남지역의 나주를 답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주일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아
정규오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고 주일학교에서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겨울이나 여름휴가를 이용 성경을 집중연구하는 부흥사경회로 교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데 치중하였다. 나아가 새벽기도회, 가정예배, 금요구역예배도 거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정규오는 동내에 세워진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한국인 목사 장로들을 통해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르침과 신앙교육은 후일 그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누구보다도 확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갈고 다져진 철저한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얻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였다고 하겠다.
정규오는 당시 방산교회 안에 사립 사설강습소가 있어서 2년동안 학습하였고, 후에는 다도면 판촌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어린 정규오에게 평생을 좌우할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책(冊)이었다. 당시 당산교회 송복순전도사님 남편 남복우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책들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동서양의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중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중학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이 있어 지식의 기초를 쌓았고, 엔사이구로베지아 일본대사상전집, 법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서적과 칼 맑스가 쓴 자본론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이론 중에 맑스의 사상을 연구한 이유는 그의 생질 이민호와 이론투쟁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문학·법학·철학·신학 등 사상 섭렵
그는 1945년 9월 신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독학을 통해 여러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신학연구를 위한 인문소양의 지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이미 한 시대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단계로 미리 많은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기반을 다지신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생애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좌·우익 대결 속에 6·25라는 참상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과 허구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자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변호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규오목사 생애 가운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이미 박형용박사가 쓴 한국의 정통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는 1935년판 <신학난제선평>(평양신학교 간행)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을 신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조선교회에서 유행하던 이사상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고 비평한 전 18장 850페이지에 달하는 변증서요, 급히 몰아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경고를 시도한 신학서적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서적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나온 많은 사상서들을 읽은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그가 1934년 11월부터 1940년 초까지 광양진상금융조합 서기로 6년간 일할 때에 출석했던 당시 광동중앙교회 담임목사(김순배)로부터 서제에서 선물로 받았던 애장품이었는데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책의 저자 밑에 강의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지 그 책의 내용을 저자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책만큼은 저자 박박사님보다 제가 신학난제선평을 더 잘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 정규오가 박형룡박사의 책과 만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오는 드디어 1945년 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8선이 그어져 남북간의 통행이 막히게 되고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 당하고, 8·15 광복 직후 <남부총회>라는 이름으로 복구되었으나, 총회직영신학교로 자유주위 신학을 대변해 온 ‘조선신학교’가 김재준을 중심으로 일부 교수들이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보수신학에 반(反)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 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자 일어난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규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
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보수신학을 사랑하는 동지 51인을 규합하여 1947년 4월 18일~22일에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총회로 내려가 진정서를 제출,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그 주동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진정서 안에는 (전문) 조선신학교에 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시(幼時)부터 가지고 오는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규오 목사의 신앙관과 정통보수신학과 정의감이 얼마나 투절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정규오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관계를 짚고 가자. 이미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기전 그의 저서를 읽고 만난 점과,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0년여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목숨을 건 모험끝에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초청도 있었지만 51인  신앙동지회 탄원서에 용기를 얻어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하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여관)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간 51인 신앙동지회를 대표한 정규오 회장과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탄원서한이 없었던들 귀국의 결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였다(정규오 생애와 삶 p.34. 2011).
정규오 목사를 이야기 할 때는 W.C.C 반대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동지회는 1953년 7월 미국복음주희협회와 같은 소속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다. 이 세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면서 WCC에 대항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세계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1차 총회(1948)와 2차 총회(1955)에 대표를 파송하였는데, 이 WCC문제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1955), 42회 총회(1957) 43회 총회(1958)에서 양측이 충돌하고 말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큐메니칼연구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지지측에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반대측에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였다. 이 두 그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반대에 박형룡 정규오였고, 지지측엔 한경직 유호준이었다.
이렇게 정규오 목사는 언제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함께 갔고 오늘의 보수신학을 지키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제64회 총회시 이끌고 나갔던 개혁측을 자신이 죽기전 합동으로 환원시키고, 그는 2006년 1월 19일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50회 총회의 결의 안건들을 보면 ①교단지<기독신보>를 당국으로부터 인가받아 간행했고, ②교역자 사례비의 5%를 적립해 은급제도 시동을 걸었으며, ③총회신학교 신축건물을 기공했고, ④WCC와 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협력 않키로 결의를 했다.
김남식은 해원 정규오를 가르켜 <그는 우리 시대의 거목이었다>면서, 고 정규오 목사의 인간됨과 일생을 농축한 말로 쉼표를 찍었다(「해원 정규오목사」 새한기획 출판부 2007. 서울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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