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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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평원출신
명신홍목사(1904. 4. 14~1975. 10. 14)는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145번지에 명진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무식했고 딸만 셋이나 낳다가 네 번째 장손인 신홍을 얻어 어떻게 해서라도 교육을 해야겠다는 열심히 있어 나이 5살 때 집에서 4리쯤 떨어진 리인리(里仁里)에 교회가 들어서고 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학교 관란학교에 입학시켰다. 신홍은 생애 처음으로 배움의 터전에서 자랐다.
9살 되었을 때 합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데 다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산술만은 아직 아라비아 숫자도 익히지 못한 터라 3학년의 산수를 따라 갈려니 어려워 학교 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손위 누나가 위안을 주며 친히 가정교사 노릇을 해주어 점점 공부성적이 뛰어 올랐고 얼마 후에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5리가 넘는 교회도 주일 낮 예배만 아니라 칠흙같은 어두운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합성학교를 마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그때 마침 숭실중학교에서 우호익선생을 중심으로 한 시험관이 합성학교에 와서 입학시험을 치루는데 부모님께서는 장사 밑천을 대서라도 공부를 시켜보고자 해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합격이 되어 그해 4월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
15세의 소년으로 숭실중학교 기숙사의 찬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며 1년간 다섯 명이 한 방에 살면서 때로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가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조선도 어서 속히 독립국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에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평원군 덕산면 봉도리로 이사를 했다.
18세가 되던 해에 다시 숭실중학교 4학년에 복교해 졸업하고, 1929년 겨울 김제면 원양리에 살던 차도정(車道正)씨의 장녀 차덕실(車德實)을 만나 결혼하였고 1남 3녀를 낳았다.
명신홍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변화의 계기가 왔는데,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와 내일을 준비하는 유학의 길이 트인 것이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생활이었지만 내일의 한국교회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기도 했다.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들어가 고학으로 공부했다. 정식 졸업은 못하였으나  수료과정을 마치고 같은 지역에 있는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 본과에 진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제하라 더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접고 1933년 귀국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1937년까지 평안북도 평원군에 있는 진지동교회에서 처음엔 전도사로, 나중엔 목사로 장립을 받고 목회를 하였다.

미국에서 신학공부, 한때 미 군정 통역관 활동
명신홍목사는 보다 먼 미래의 조선교회를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1937년 도미 계획을 실천, 태평양을 건너 보수정통신학의 명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하여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마친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칼빈신학교로 가서 대학원과정을 이수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동아 전쟁의 여파로 귀국할 형편이 못되어 뉴욕으로 가서 귀국 기회를 엿보면서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할 형편이 또 미루어지면서 잠시 동안 미 국무성 우편물 검열국에서 검열관의 자리를 얻어 1945년 8월 귀국하기 직전까지 근무하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이 되자 즉시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자마자 미쳐 정부수립 작업의 과도기로 유엔 감시 하에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정부격인 미 군정청(美軍政廳)에서 고문관으로 봉직,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이승만)가 정식 발족되기까지 해방공간 2년간의 환란기를 통역관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국가발전에 일시적이었지만 크게 이바지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서 목회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만 10년이 넘는 인생 황금기에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에 부임, 담임목사로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써 리더십을 십분 발휘한 기간이기도 했다. <서문교회 100년사>를 쓴 이혜정박사는 정재순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1946년 명신홍목사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 부임했다. 명신홍목사는 1946년 7월 24일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한국 격동기 11년간 시무하면서 교회 창립 40주년 행사 등 교회를 안정시킨 목회자이다. …명신홍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신 목회자로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1947년 2월 16일 위임받아 1957년까지 11년간 담임목사로 헌신하면서 특히 미 군정청 고문관 시절에 영어 통역관의 역할을 하면서 대구시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1948년 10월 17일부터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을 개원 운영했고, 1950년 6월엔 ‘중등부’가 조직되었고 1952년엔 전쟁의 와중에서도 교회 설립 4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편 p168).

총회신학교 교수 및 학장 역임
명신홍목사의 인생 후반부 사역과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교단의 인재양성 기관이요, 목회자 양성기관인 총회신학교 교수사역과 학장의 활동이라 하겠다. 그가 총회신학교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인해 총회신학교가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잠시 운영되고 있을 때부터 교단의 요청으로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는 이미 경북지역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목회자로 서문교회만 섬긴 목사가 아니라 경북노회(1951년)와 전쟁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1953년 4월 자기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이미 교계에 익히 알려질 정도로 지도자상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되자 총회신학교도 자연히 정부를 따라 수도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명신홍목사도 교수자격으로 서울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가 상경한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1953년 4월엔 화란 왓스코텐 개혁교회 동부대회에 한국대표로, 이듬해 1954년 8월엔 미국 프린스톤 개혁교회세계대회, 1955년 8월 미국 에번스톤 세계기독교연합회, 1959년 3월 미국 미주리 주 타키오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D.D), 1962년 9월 총회장으로부터 교단과 신학교에 끼친 공로로 표창,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사(H.L.K.X 방송), 장로교와 개혁교회 소속 세계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드디어 1965년 2월엔 그가 평생 몸담아 가르치던 총회신학교 수장(교장)의 자리에 올라 1969년 2월 퇴임하기까지 봉사하였다.
예장총회장을 지낸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명신홍목사를 “목회자, 교회행정가, 뛰어난 교육행정가”로 평한 바 있으며(신학교육과목회, 정성구, 1997. p.47), 대성교회 원로요 총회장을 역임한 서기행목사는 “…명(신홍)박사님은 오늘의 우리 예장통합 측을 있게 한 공로자요, 오늘의 총신대학교의 기초를 쌓은 분”(같은 책 p.50)이라고 했다.

박형룡·박윤선·명신홍 3대 거장
그의 제자요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의한 박사도 “명(明)목사님은 명(名)목사님이셨다. 목회에 대성하셨고 총회장도 역임하셨고, 총신의 교장으로도 봉사하셨다.”(같은 책 p.201)
<신학교육과목회>라는 제목으로 명신홍박사의 전기를 펴낸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선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체계를 세웠던 일이고, 나의 영적 아버지였던 박윤선 박사님으로 부터 선경신학의 맥과 신앙의 참모습을 전승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신홍 박사님으로 부터는 설교의 신학과 실제의 참뜻을 배웠다.
세 분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후일 편자가 칼빈주의 사상을 정리해서 20년 이상 가르칠 수 있게 된 동기가 되었다”(같은 책 서문, 정성구의 글 p.37-38 참조)
1953년 4월 24일~28일에 있었던 대구서문교회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① 통일 없는 휴전 반대하기로 하다. ② 10월6일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교 설립허가를 받다(교장 감부열 선교사). ③ 경안노회를 경안·강동 노회로 분리 허락하다. ④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치 못함으로 각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⑤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 및 성경 유오설을 주장했음으로 목사직(牧師職)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다. ⑥ 기독교장로회 측이 분열해 나가다(제98회 총회 찰요, 예장총회 2014. 3 p.18 참조).
현재의 사당동 총신대학교 종합관 새 건물 이전의 본관건물은 학교발전계획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본관 구건물은 명신홍목사가 육신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본관건물 신축을 위해 미국에 가서 교통비(비행기를 타지 않고 선편으로 귀국함)를 아끼고 숙식비를 아끼며 모금한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건축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전설처럼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명신홍 학장의 총신사랑의 열정을 후학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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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38회 총회장 명신홍(明信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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