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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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1875. 9. 27-1036. 11. 17)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1833년 한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1804년 기능참봉(冀陵參奉)이란 말직(末職)을 받아 봉직한 적도 있는 그는 대구로 내려와 우연히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결신해 1911년 10월 13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 선교지부에 나와있는 어도만(Rev. Walter C. Erdman 魚도万)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연봉남이 대구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미국인이 서투른 우리 말로 전도하는 것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말로만 듣던 미국인을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미국놈 물러가라”며 욕설을 퍼 붓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간단한 열설을 하고 난 후에는 쪽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공식 선교사로 영남지역의 최초선교사로 부산에 파송 받은 후 대구를 거쳐 나중 평양선교부 교육담당 선교책임을 맡은 안의와(Rev. James E. Adams, 安義窩) 목사였다. 그는 배위량(William M. Baivd, 裵偉良) 선교사의 처남이다.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쪽복음 받아
염봉남은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선교사로부터 쪽복음을(마태복음)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그 책을 1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복음 제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읽는 순간 이 종교는 양반들이 믿을 종교라고 생각이 들어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는 쪽복음으로 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양반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꼭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알고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남문 안에 있는 남성정 선교사집을 찾아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노크하였다. 누구요?라는 큰 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렸다. “저는 선교사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온 염봉남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담스 선교사는 신기해 하며 문을 열어 주고 염봉남 청년을 반가히 맞아 드렸다. “선교사님 저에게 쪽복음을 팔게 해 주세요. 저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성경 쪽복음을 팔게 해 달라고 하는 염봉남에게 아담스(Adams)는 쪽복음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염봉남은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구역에서 일할 수 있는 조사(助師)로 임명을 받고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옆에서 주의깊게 지켜본 안의와는 염봉남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쪽복음 파는 권서로 출발
한편 그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 개설되는 달(月)성경학교에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꼭 참석하여 3년간의 모든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이에 감동한 안의와 선교사는 염봉남을 1912년 자신의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잠시동안 달성지방 내에 있는 3개처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의 일을 하였다.
염봉남은 이와같이 안의와 선교사의 따뜻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1915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자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산읍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1920년 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1년 1월부터 1923년 1월 6일까지 경산읍교회 제1대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잠시 떠났다가, 1925년 2월에 임시목사로 다시 부임 그 해 말에 사임하고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로 전임하였다(경산교회 100년사, 김광남, 2010 대구 pp.196-202).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안에서 이름난 양반목사로 존경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서문교회(구 신정교회) 당회에서 청빙서를 작성해 한 부는 염봉남 목사에게, 또 한 부는 경북노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염봉남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학비를 보조해 준 경산읍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처음엔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2005. 장로교출판사 p.79).
그러나 재차 신정교회로부터 강력하게 청빙해 오므로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新町敎會)를 방문하여 당회원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로님들의 뜻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경북도청이 있는 대구로 목회지를 옮기고 싶지만 목사가 기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진중한 속마음의 거절의사를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정교회 당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설득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회원들 마음 속에 약속이나 한듯,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똘똘뭉쳐 염봉남 목사를 적극적으로 모셔야겠다는 강한 의중을 갖고 염목사를 설득하였다.
“예! 목사님의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경산읍교회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고, 대구 신정교회도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도 우리 신정교회 당회원들의 마음과 신정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이렇게 얼마동안 서로간 대화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상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 목사 사택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염목사 모르게 모여 의논하게 되었다. 당회원들 가운데 어떤 장로는 우리 교회 염봉남 목사를 보다 큰 도시에 가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고 제안하여 누가 강권한 것도 아닌데 당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당회장 염봉남 목사 사택을 방문해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시어 더 큰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권유를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자 염봉남 목사의 대구 신정교회로 부임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무 어려운 문제없이 경북의 중심지 대도시인 대구 신정교회로 은혜 가운데 부임하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가 부임한 1922년 신정교회 교인수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33년 교인총수는 1988명으로 성장하였고 1928년 5월 6일 대지 569평 건평 294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 헌당 하였으며, 염목사는 신앙인격과 리더십도 겸비하여 경북노회 노회장으로 두번이나(1920년, 1921년) 역임하였고, 1928년 9월 7일에 모인 (대구신정교회당)총회에서 교단의 수장격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7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대구 신정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
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정교회 성도들과 경북노회 전교회가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그가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뜻있는 몇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하다. ② 총회산학 각 노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총회는 농보(農報) “농민생활”지를 간행하기로 하다. ③ 조선주일신보 “아이생활”지를 출판하도록 하다.  ④ 장로교 감리교가 협동하여 12월에 “신정찬송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를 부흥시킨 목사이고 신정교회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2교회 90년 역사에서 노회와 총회에서 많은 공헌을 한 위대한 목사로 역사에 길이 남긴 교회의 지도자로 승리한 주의 종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영남지역의 초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1936년 1월 17일 염목사는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박사 저 2015,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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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7회 총회장 염봉남(廉鳳南)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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